[책과 길] 국가 고도성장, 정말 독재자 능력 덕분일까

입력 2016-12-08 18:51
독재 권력이 경제 성장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독재자의 추진력이 고도 성장을 이끌 수 있다는 목소리 반대편에는 독재 권력의 비민주성이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는 의견도 많다. 사진은 1976년 5월 포항제철소 2고로 화입식에 참여한 박정희 전 대통령 모습. 국민일보DB
박정희 전 대통령 덕분에 한국의 경제발전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그가 없었다면 경제발전은 없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속에 그에 대한 향수가 부활하면서 딸 박근혜는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다. 나아가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대통령까지 올랐다. 그런데 1960∼70년대 눈부신 경제발전은 과연 박정희 전 대통령 때문이었을까.

박정희만이 아니라 중국 덩샤오핑, 싱가포르 리콴유, 대만 장제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칠레 피노체트 등 집권 시절에 높은 경제성장을 기록한 독재자들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독재자가 국가를 발전시킨다고 믿는다.

하지만 미국 뉴욕대 교수로 16년간 세계은행에서 일한 발전경제학자인 저자는 독재자와 전문가가 선호하는 발전방식인 ‘권위주의적 발전’의 허상을 통렬히 비판한다. 저자에 따르면 발전은 개인의 권리가 자유롭게 행사될 때 일어난다. 독재자 집권기에 고도성장을 달성했던 한국 등의 사례에 대해 그는 ‘인자한 독재자’라는 심리적 편향에 좌우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오히려 발전에 독재 권력은 필요 없다고 강조한다. 독재 권력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함으로써 오히려 발전을 가로막을 뿐이라는 것이다.

경제 성장에서 지도자의 역할과 국가의 역할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적 효과, 즉 그 국가가 위치한 지역적 효과는 경제 성장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친다. 반면 경제 성장에 의미 있는 지도자 효과는 찾기 어렵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독재 정부의 성장률은 워낙 오차가 많은데다 독재자의 지도력이 국가의 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독일이나 일본은 군국주의 정권이 무너진 2차대전 이후 고도성장을 기록했지만 특정 지도자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와 관련 국내 진보적인 연구자들도 박정희정부 시절의 성장에 대해 한국이라는 특정한 지정학·역사적 조건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당시 자본주의 세계 경제가 상승 주기를 타면서 투자와 원조가 많이 들어온 데다 국민들이 근면하고 성취욕·교육열이 강해 산업화를 빠르게 추진할 여건이 갖춰진 것이다. 마침 한국 대만 등 아시아 신흥개발도상국의 라이벌이 많지 않았던 것도 이점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이들 아시아 신흥개발도상국은 세계적으로 경기가 둔화되고 경쟁자들이 많이 등장한 2000년 이후엔 세계 평균 수준의 성장을 보여준다.

저자는 또 정부가 전문가들을 지명하고, 이들이 해결책을 제시하는 ‘권위주의적 발전’이 독재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이용된다고 지적한다. 세계은행에서 오랫동안 일한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빌 게이츠 재단이나 세계은행이 아프리카 등 제3세계의 발전을 도모하는 프로젝트들이 성공한 사례가 없다고 지적한다. 특정 지역의 발전을 위한 지식은 내부자들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세부적이라 외부 전문가들은 알기가 어렵다. 게다가 외부 전문가들이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놓도록 유인하는 혜택이 없다는 점에서 ‘도박’이라는 것이다.

독재자도 전문가도 아니라면 누가 국가를 발전시킬까. 저자는 발전을 성취하는 주체는 자유롭게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개인이라고 강조한다. 그동안 전 세계에서 독재자와 전문가 집단의 정치적 이해가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개인의 권리를 억압했다. 하지만 발전은 독재자 덕분이 아니라 오히려 독재자의 굴레를 극복한 결과이다. 서로의 권리를 중시하는 개인주의적 가치가 확산된 곳만이 장기적으로 번영을 구가해 왔다.

미국 영국 등 민주주의가 일찌감치 무리내린 서구 국가들의 경우 ‘자유로운 발전’이 득세했다. 이와 비교해 중국의 경우 불완전하지만 개방 정책을 펴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보이고 있다. 또 한국은 성장 제일주의, 재벌 중심주의 등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의 성장 메커니즘이 결과적으로는 한국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결국 경제 발전은 정치적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국가가 정치·경제적 권리의 체계를 올바로 갖추어야만 다수의 개인이 자신의 발전을 위해 올바른 행동에 나선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국가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