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와 똑같이... “靑이 요구해서”

입력 2016-12-06 17:44 수정 2016-12-06 21:25
5공화국 정권의 일해재단 국회 청문회가 열렸던 1988년 12월 14일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증인으로 참석해 답변하고 있다(왼쪽 사진). 그로부터 28년 만인 2016년 12월 6일 다시 국회에서 박근혜정부의 미르·K스포츠재단 관련 청문회에 재벌 총수들이 증인으로 출석해 증인석에 나란히 앉아 있다. 왼쪽부터 손경식(CJ) 구본무(LG) 김승연(한화) 최태원(SK)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신동빈(롯데) 조양호(한진) 정몽구(현대차) 회장. 최종학 선임기자, 국민일보DB

재벌 총수 9명이 6일 나란히 국회 청문회에 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집권 연장용 재단이었던 ‘일해(日海)재단’에 대한 1988년 5공비리 청문회 이후 28년 만이다. 당시 기업 총수들은 선의로, 혹은 강압에 의해 돈을 냈을 뿐 특혜는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28년 만에 재현된 역사의 무대에서 총수들 발언은 그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석연찮은 계열사 합병, 총수 특별사면, 최순실 일당에 대한 특혜 연관성도 모두 부인했다. 정경유착이란 오욕(汚辱)의 역사는 촛불민심이 타오른 2016년에도 그대로 반복됐다.

‘박근혜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는 이날 국회에서 1차 청문회를 개최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몽구(현대기아차) 최태원(SK) 구본무(LG) 신동빈(롯데) 김승연(한화) 조양호(한진) 손경식(CJ) 회장과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인 허창수(GS) 회장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특위 위원들은 이들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한 자금 출연, 최씨 일가에 제공한 특혜를 대가로 ‘뒷거래’를 했는지 집중 추궁했다. 하지만 이들 답변은 모두 ‘청와대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다’에 그쳤다. 특별검사 수사를 앞두고 청문회에서 대가성을 인정할 경우 제3자 뇌물죄 등으로 처벌받을 것을 우려한 탓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기금 출연을 요청한 것에 대해 “저희가 (대가로) 뭘 받았거나 반대급부를 요구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최씨에 대해선 “모른다”고 답했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자해성 지원’을 받았다. 대한승마협회장인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은 직접 독일로 가 승마선수인 최씨 딸 정유라씨를 지원했다.

롯데그룹은 회장 일가의 ‘형제의 난’으로 인한 검찰 수사와 면세점 사업자 선정 등 그룹 존폐가 걸린 상황에서 자금을 출연했다. K스포츠재단에는 70억원을 추가 출연했다가 검찰 압수수색 직전 돌려받기도 했다. 하지만 신동빈 회장은 대가성에 대해선 “전혀 관계없다”고 했고, 압수수색 사전 인지 여부에 대해선 “우리 조직이 그렇게 좋은 정보는…”이라고 부인했다.

한화는 2014년 삼성테크윈·탈레스·토탈을 인수하며 방산업계에서 독보적 지위를 획득했다. 또 당시 김승연 회장은 특별사면 검토 대상이었다. 역시 사면 문제가 걸려 있었던 최태원 SK 회장도 “대가를 생각하고 출연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강제 모금을 주도하며 정경유착의 고리로 떠오른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청와대 요구를 거절하긴 어렵다”고 발을 뺐다. 구본무 LG 회장도 “기업 입장에선 정부 정책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만 이재용 부회장과 최태원·구본무 회장은 의원들의 거듭된 추궁에 향후 전경련을 탈퇴하겠다고 밝혔다.

글=강준구 기자 eyes@kmib.co.kr, 사진=최종학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