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99> ‘2인 영화’의 맛

입력 2016-12-06 17:34
로버트 미첨과 데보라 커

오랜만에 옛날 영화를 봤다. 거장 존 휴스턴이 연출한 1957년 영화‘하늘은 알고 있어요, 앨리슨씨(Heaven Knows, Mr. Allyson)’. 로버트 미첨과 데보라 커 두 명우가 주연이다. 아니 단순히 주연이라기보다 오직 둘이 러닝타임 106분을 끌고 간다.

2차대전 중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에 고립된 미군 병사와 수녀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국내에서 코미디언 고(故) 김형곤이 출연한 연극 ‘병사와 수녀’로 더 많이 알려졌다. ‘섹시 코미디’를 표방한 국산 연극은 원작과 무관하다. 신분을 떠나 고립된 섬에 갇힌 젊은 남녀 사이에 뭔가 야릇한 일이 일어날 법하지만 영화는 두 남녀의 우정과 애정을 속에 간직한 채 담담하게 흘러간다.

남자주인공 앨리슨 하사는 천애고아로 비행청소년 시절 교정시설을 들락거리다가 해병대에 입대한 거칠고 조야한 사내다. 수녀에게 신체적으로 접근할 만함에도 일절 수작 부림 없이 단 한 번 결혼하자고 졸랐을 뿐이다. 그 ‘프러포즈’가 거절당했지만 끝까지 수녀에게 존댓말(ma’am)을 써가며 예의를 잃지 않는다. 터프하면서도 정중하고 조야하면서도 고귀한 인격을 지닌 사나이 캐릭터가 어찌나 마음에 들었는지 미첨은 자신이 한 역할 중 가장 좋아했고, 그가 맡기 전 존 웨인, 커크 더글러스, 클라크 게이블, 말론 브랜도 같은 ‘상남자’ 배우들 역시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1947년 작 ‘흑수선’에서 수녀를 연기했던 데보라 커는 다시 수녀 역을 맡아 특유의 고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마음속으론 사랑하면서도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남녀를 놓고 개봉 당시 국내에선 ‘백사(白沙)의 결별(訣別)’이란 제목을 붙였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헤어진다는 뜻의 제목은 고색창연하지만 영화 주제를 명확히 살리고 있다. 참고로 원제는 수녀가 했음직한 말이나 영화에 그런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올스타 캐스트에 비하면 맛이 단조롭지만 때로는 한두 명의 배우만으로도 충분히 배가 부르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리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