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바람에 영국과 미국에 이어 세 번째 도미노가 쓰러졌다. 이번에는 이탈리아다. 국민 60%가 헌법 개정에 반대표를 던져 현 정권을 심판했다. 개헌을 주도한 마테오 렌치(41) 총리는 퇴진을 선언했다. 유럽연합(EU) 탈퇴를 주장하는 포퓰리즘 정당의 집권 가능성이 커지면서 유럽에 드리운 반(反)EU 그림자는 더 짙어졌다.
이탈리아 선거관리위원회는 4일(현지시간) 치러진 개헌 국민투표 개표 결과 반대가 59.95%, 찬성이 40.05%(재외 국민투표 제외)로 집계됐다고 5일 밝혔다. 20% 포인트에 달하는 압도적인 표차다. 정치 생명을 걸고 개헌을 추진한 렌치 총리는 출구조사에서 반대(54∼59%)가 찬성(41∼46%)을 앞지르자 책임지고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5일 새벽 대국민 연설에서 “나의 정부는 오늘 끝났다. (세르지오 마타렐라)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2014년 2월 이탈리아 최연소 총리로 취임한 지 2년9개월 만이다. 남은 임기는 피에르 카를로 파도안(66) 재무장관이 채울 가능성이 높다.
중도 좌파 개혁주의자인 렌치 총리의 개헌안은 315명인 상원의원을 100명으로 줄여 행정을 효율화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탈렉시트(Italexit·이탈리아의 EU 탈퇴)와 반(反)이민을 주장하는 포퓰리즘 성향의 제1야당 오성운동이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상원을 축소하면 총리 권한이 비대해져 베니토 무솔리니 같은 독재자가 생길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민심은 오성운동의 손을 들어줬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대서양 양쪽에서 불어닥친 반체제 세력의 힘을 가늠해볼 수 있었던 투표”라며 “반이민주의자, 극우파에 맞선 젊은 리더(렌치)가 결국 무너졌다”고 평가했다. CNN방송도 ‘포퓰리즘의 승리’라는 제목의 기사로 투표 결과를 전했다.
영국 BBC방송은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처럼 기성 정치에 대한 이탈리아 국민의 염증이 표출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경제난, 이민자로 인한 위기감, 강력한 중앙정부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작용했다는 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이탈리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09년 남유럽 재정위기 때(3만3866달러)와 비슷한 3만6072달러(약 4237만원)에 그쳤다. 실업률은 7.8%에서 11.9%로 뛰었다.
2018년 2월로 예정됐던 이탈리아의 다음 총선은 내년 상반기로 앞당겨질 전망이다. 베페 그릴로(68) 오성운동 대표가 집권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코미디언 출신인 그릴로는 트럼프 못지않은 직설 화법으로 기성 정치권을 저격하며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극우파인 마테오 살비니(43) 북부동맹(NL) 대표도 부상하고 있다. 다만 영국 일간 가디언은 국민들이 개헌에 반대했을 뿐 오성운동과 NL을 지지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선을 그었다.
이탈리아 정세는 EU의 존립을 위협하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내년 선거를 앞둔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의 포퓰리즘 세력에 동력이 될 수 있어서다.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FN) 마린 르펜 대표는 트위터로 이탈리아 투표 결과를 전하며 “국민의 자유와 보호를 향한 이들의 갈증에 주목하라”고 썼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
伊 개헌 국민투표 부결… 렌치 총리 사임
입력 2016-12-05 18:33 수정 2016-12-05 2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