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서부터 자정까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뉴스를 읽고, 보고, 챙기기 한 달여. 이젠 더 놀랄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일에도 대통령이 출근하지 않고 관저에 머무는 날이 많았다는 소식엔 시쳇말로 꼭지가 돌았다. 초등학생 정도의 성실성도 없는 사람을 우리는 국가 최고지도자로 예우하고 ‘어록’을 꼬박꼬박 크게 보도해 왔다. 기막힘과 분노는 곧 참담함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사실이 집권한 지 4년이 된 지금에야 드러나나. 청와대를 출입하는 그 많은 기자들은 뭘 했단 말인가. 몰랐다면 나태·무능이요, 알고도 쓰지 않았다면 명백한 직무유기다.
청와대의 이미지는 갈수록 괴기소설에 나오는 어둠과 미스터리의 집으로 변해간다. 청와대의 기괴한 그림자에 비례해 국민들이 갖는 의문도 커지고 있다.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분이 어떻게 유력 정당의 지도자가 되고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나. 많은 국민들이 지난 대선에서 기호 1번을 찍은 자신의 손가락을 저주하면서 묻고 있다. 이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좀 더 정확한 정보가 있었다면 1번을 찍었겠느냐. 언론이 최소한 경고를 보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당시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을 담당하고 박근혜 대통령을 취재했던 기자들도 할 말이 있다. 1998년 경북 달성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에 진출한 박 대통령은 이미 특별한 존재였다. 박정희의 딸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으로 2년 만에 당 부총재에 올랐다. 2004년엔 대선 차떼기 파동 등으로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 구원에 나서며 당대표로 수직상승했다. 기자들과 대면 접촉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거물 정치인으로 도약했다. 정치 초년병 시절부터 당 차원의 조직적인 관리와 방어를 받았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불통은 원칙주의로, 대인기피증으로까지 보이는 비밀주의는 여성의 프라이버시로 포장됐다. 박 대통령의 결함을 알았을 친박근혜계는 정권 획득을 위해 하나같이 쉬쉬했다. 2012년 18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후보 간 토론회도 역할을 하지 못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미리 준비된 질문지를 배포했고, 후보들이 외워온 답변을 되풀이하거나 읽어가는 황당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최근 전 국민은 기자들의 ‘해명’을 무색하게 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박 대통령이 최순실 사건 관련 첫 번째, 두 번째 대국민 담화를 발표할 때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수백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퇴진을 요구하는 비상 상황에서도 청와대 춘추관은 대통령의 일방적 주장과 해명을 전달하는 스피커였을 뿐이다. 여기엔 기자들의 질문을 한사코 받지 않으려는 대통령의 아집이 큰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질의응답을 하는 기자회견을 단 두 차례 했다. 그마저 사전에 질문내용과 질문 순서까지 청와대 홍보수석실에서 정했다. 청와대의 이 짜고 치는 기자회견은 일찍부터 외신기자들의 웃음거리가 돼 왔다. 하지만 출입기자 개인이나 기자단의 항의나 저항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없다.
2014년 11월 4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프레스룸에 섰다. 상·하원 과반의석을 모두 공화당에 내준 참담한 중간선거 결과를 받아들고였다. 초췌한 모습의 그에게 기자들은 온갖 질문을 쏟아냈다. 그중에는 오바마가 말을 더듬을 정도의 난처한 것도 많았다. 하지만 오바마는 더 질의가 없을 때까지 70분간 회견을 진행했다.
민주주의는 헌법에 명시되고, 선거를 하고, 정당이 있다고 유지되지 않는다. 국민을 대표해서 권력자에게 송곳 질문을 하는 것이 특권이자 책무요, 의무임을 아는 기자들이 있어야 작동한다. 필자도 기자로서 부끄럽다.
배병우 편집국 부국장 bwbae@kmib.co.kr
[돋을새김-배병우] 입 닫은 대통령, 묻지 않는 기자
입력 2016-12-05 1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