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부희령] 책 속의 사랑

입력 2016-12-01 18:29

중학교 3학년의 긴 겨울방학 동안에는 나는 거의 폭식에 가까운 독서를 했다. 하루 종일 화장실에 갈 때 이외에는 거의 이불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집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책을 허겁지겁 읽었다. 밥 먹는 것도 귀찮았다. 그 폭풍 같은 독서는 아버지가 세계명작전집 한 질을 사서 집에 들여놓은 일이 계기가 되었다. 시작은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나는 이틀 동안 거의 잠도 안 자고 두꺼운 책 두 권을 탐독했다. 밤을 새워 책을 읽으면서도 남아 있는 페이지가 점점 줄어드는 게 안타깝기만 했다. 그리고 톨스토이, 헤르만 헤세, 스탕달, 루소의 ‘고백록’에 이르기까지.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일을 하는 동안에는 자연스럽게 책과 멀어졌다. 현실과 사람들 속에서 즐거워하거나 부대끼면서 살았다. 아이가 다 자라고, 결코 끊어지지 않으리라 믿었던 인간관계들이 저절로 끝나면서, 다시 나는 책을 읽게 되었다. 고즈넉하게 책을 읽고 있노라면 책과 함께 하루 종일 뒹굴뒹굴하던 청소년 시절 그 겨울의 시간들로 돌아간 기분이다.

나에게 책이란 사이좋게 함께 늙어가는 연인 같다. 다정다감한 소통과 서로의 눈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일. 둘이 함께 자아의 둘레를 넓혀가는 환희. 게다가 책이 바뀔 때마다 모습과 성격이 달라진 새로운 연인이 나타난다. 어쩌면 나는 현실의 사람들보다 책 속에 나오는 인물들, 성격들, 화자들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감정과 욕망이 계속 변하며 나와 갈등하고 충돌하는 주위 사람들보다 성공적 서사 속에서 스스로를 설명하는 고정된 캐릭터들에게 더 호감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변하지 않는 매력적인 태도와 이미지를 설정해서 유지하는 연예인이나 정치가 같은 유명 인사들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사실 그건 좀 위태로운 일이기도 하다. 사랑이라면, 내 주위에서 함께 살아가는, 피와 살을 지닌, 저 변덕스러운 사람들부터 사랑해야 하는 것일 텐데.

글=부희령(소설가), 삽화=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