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홈쇼핑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이모(26·여)씨는 29일 사무실 TV로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담화를 지켜봤다. 같은 층에 있는 직원 150여명의 눈길도 TV로 모였다. 사무실을 지나치던 사람들도 TV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대통령이 담화문을 읽어 내려가자 사무실 곳곳에서 한숨이 터졌다. 일부는 “죄송하다는 말이 듣고 싶은 줄 아느냐”며 발끈했다. 이씨는 “대통령이 단 한순간도 사익을 추구한 적이 없다고 했을 때 기운이 빠졌다”면서도 “이젠 실소가 다 나온다”고 말했다.
만성질환되는 순실증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뉴스를 지켜보다 건강까지 해치게 되는 이른바 ‘순실증’이 만성질환으로 굳어지고 있다. 박 대통령은 1차부터 3차 담화 내내 자신의 결백을 되풀이하거나 검찰 조사를 받겠다던 입장을 뒤집는 등 국민을 자극했다.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중심에 서면서 ‘순실증’이 아니라 ‘근혜증’이라고 고쳐 불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최순실 게이트가 유발한 분노와 우울증이 점차 무기력과 자조로 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홍진표 삼성사회정신건강 연구소장은 “최순실 사태가 길어지면서 증세가 다양하게 변형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은 “아무리 노력해도 지금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무기력감이 커지고 있다”며 “온 사회가 아노미 상태에 빠져 우울과 자조에 빠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외계층 상실감 더 커
박 대통령 퇴진 등 시민들이 품었던 기대가 무너지면서 병세는 더 나빠졌다. 홍 소장은 “분위기가 대통령 퇴진으로 흘러가다 급반전됐다”며 “기대가 무너지면 증상이 한층 심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원리로 박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도 더 지독한 순실증에 시달린다”고 덧붙였다.
순실증은 노력하면 보상받는다는 신념이 무너진 데서 비롯한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이준영 서울보라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언젠가 보상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깨지면 사람은 무기력해진다”며 “특히 소외계층은 이 믿음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극단적 행동도
통제할 수 없는 거악(巨惡)에 부딪혔을 때 느꼈던 불안감이 이제는 적대·우울감으로 변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 교수는 “위험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대상과 마주쳤을 때 드는 감정이 불안”이라며 “그런데 그 대상이 생각보다 보잘것없고 평범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적대·우울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시민들은 극단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최모(55)씨는 지난 28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박근혜를 처벌하라”고 외치며 자기 몸에 등유를 들이붓고 불을 붙이려 했다. 최씨는 경찰에서 “박 대통령이 계속 물러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뉴스로 보면서 화가 났다”고 진술했다.
이기경 양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과장은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과격한 형태로 분노를 나타낼 수 있다”며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배신당한 보수성향의 고령 남성
연령과 정치성향, 직종 등에 따라 순실증을 앓는 정도와 양상도 다르다. 특히 보수적인 고령 남성이 순실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홍 소장은 “박 대통령에 건 기대가 컸던 데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우울한 소식에 노출될 가능성도 높다”고 분석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정신의학과를 찾은 윤모(71)씨가 대표적인 사례다. 윤씨는 평소 애국 보수를 자처해 왔다. 하지만 그런 자부심이 더 큰 절망으로 되돌아왔다. 윤씨는 “신문이나 TV에서 연일 ‘자신이 틀렸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 같아 괴롭다”고 토로했다.
원칙 무너진 진보 1020세대
진보적인 1020여성도 위험군이다. 민주주의와 공정성 등 ‘노력한 만큼 성공해야 한다’는 규범을 믿는 세대여서다. 이들은 국정농단 사태가 한국 사회의 원칙을 훼손했다는 데 분노한다.
공감능력이 발달한 여성일수록 순실증이 전염되기 쉽다는 설명도 더해진다. 이 교수는 “원칙을 중요시하는 세대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움직인다”며 “나를 바꾸기보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취업준비생 정모(26·여)씨는 “애초 기대도 안 했지만 대통령이 마지막 남은 책임감마저 국회로 던져버렸다”고 비판했다.
일상 무너진 30대 직장인
30대 직장인도 순실증에 취약하다. 백종우 경희대 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30대 직장인은 뉴스 소비와 SNS 활동이 활발하다는 특징이 있다”며 “충격적인 뉴스에 자주 노출되는 것”이라고 봤다. 직장인 박모(32)씨는 “뉴스에 중독된 것처럼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기 힘들다”며 “일상 리듬까지 깨지면서 몸이 무겁다”고 털어놨다.
만성 순실증은 사회 전체의 활력을 떨어트린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헬조선에서 읽어낼 수 있었던 자조와 절망적인 분노가 우리 사회에 자리잡았다”며 “‘우리나라는 역시 안돼…’라는 식의 패배주의가 계속된다면 사회 전체에 활력이 떨어진다”고 우려했다. 백 교수는 “사람들이 직접 사고를 당하진 않았더라도 언론을 통해 2차 외상을 겪고 있다”며 “가해자가 진심으로 사과·해명하고 처벌받는 모습을 보여야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오주환 기자, 글=이기수 의학전문기자 johnny@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
[기획] 잇단 ‘결백 담화’에 분노·우울… ‘근혜症’ 앓는 국민들
입력 2016-12-01 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