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뉴스] 꽃들 스러져도… ‘의료사고 방지法’ 외면하는 어른들
입력 2016-12-02 04:03 수정 2016-12-05 17:22
여기 4명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8살부터 19살까지 소중한 아들, 딸들이었습니다. 평소 건강한 아이도 있었고, 많이 아팠지만 건강을 되찾을 희망에 찬 아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의료사고로 하늘나라에 있거나 식물인간이 됐습니다. 의료사고는 의사 개개인의 부주의도 크지만 밑바탕에는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레지던트(전공의)에게 과하게 의존하는 대형병원 운영체계, 유명무실한 선택진료제, 의료사고 예방 부재 시스템 등이 그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는 제2의 종현이, 예강이, 성은이, 영준이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백혈병을 앓던 종현이(당시 9살)는 2010년 5월 3년여간의 항암치료 마지막 치료 중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맥에 놔야 할 항암제 ‘빈크리스틴’을 허리뼈에 맞고 10일간 고통 속에 있다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레지던트가 주사액 색깔이 비슷한 두 약을 바꿔 주사해 일어난 사고였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예강이는 건강체질이었습니다. 2014년 1월 코피가 멈추지 않아 서울의 유명한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습니다. 응급실 의료진은 급한 수혈을 제때 하지 않고, 오히려 허리뼈에 주사바늘로 척수액을 꺼내는 요추천자 검사를 실시했습니다. 숙련이 덜된 레지던트 1, 2년차 2명이 번갈아 5번이나 척수액 추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그 과정에서 예강이는 쇼크로 사망했습니다.
2007년 고3이던 영준이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습니다. 병원은 간단한 수술이고 실력 있는 전문의를 선택 진료했으니 걱정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영준이는 수술 도중 의식을 잃었습니다. 마취 전문의가 해야 할 일을 레지던트가 대신했다 사고를 낸 것입니다. 지금도 영준이는 식물인간 상태로 병원에 있습니다.
12살 성은이는 폐동맥고혈압이라는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가족여행을 갔다가 응급상황이 발생해 가까운 대학병원으로 급히 아이를 옮겼지만 아이는 깨어나지 못한 채 두 달여 만에 눈을 감았습니다. 이 질환을 처음 겪은 병원 응급실과 중환자실 의료진의 실수가 화를 불렀다고 성은이 부모님은 의료소송을 진행 중입니다.
이 아이들의 희생으로 올해 3개의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의료사고가 났을 때 이를 감추지 않고 모든 의료기관이 공유해 반복되는 의료사고를 막자는 취지의 환자안전법은 지난 7월부터 시행됐습니다. 종현이 사고를 계기로 입법돼 ‘종현이법’으로도 불립니다.
병원에 비해 ‘을’의 위치에 있는 중대한 의료사고 피해자가 의료분쟁조정원에 조정신청을 냈을 때 의료기관이 이를 거부할 수 없게 한 의료분쟁조정법은 지난 30일부터 개시됐습니다. 피해자의 의료분쟁 조정신청을 해당 병원이 뭉개며 진실규명에 어려움을 겪은 예강이와 고(故) 신해철씨 이름을 따서 예강이법, 신해철법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턴과 레지던트들의 열악한 근로환경을 개선해 의료사고 발생 가능성을 낮추는 목적을 가진 전공의 특별법은 이달 29일부터 시행됩니다. 위의 4명의 피해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레지던트에 의해 사고를 당했습니다. 2015년 전공의 수련 및 근로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이들 4명 중 3명은 최대 연속 근무시간이 36시간을 초과합니다. 36시간 동안 잠을 못 잔 의료진에게 안전한 치료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3개의 법은 의료사고 예방과 사후구제라는 측면에서 서로 연관돼 있습니다. 이 법들이 취지에 맞게 정착이 된다면 환자와 의사 모두 지금처럼 의료사고에 노출되는 경우가 적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희망적이지 못합니다. 시행 4개월이 넘은 환자안전법은 유명무실합니다. 보건복지부가 더불어민주당 기동민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환자안전 전담인력을 배치해야 할 의료기관 959개 중 이 법을 준수한 병원은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 또 전담인력을 배치한 병원을 보면 536명의 전담인력 중 의사는 단 2명에 불과합니다. 이 법은 익명으로 병원들이 의료사고 관련 정보를 보고하면, 이를 복지부가 전국 의료기관에 주의경보를 발령하는 게 핵심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복지부가 환자안전 주의경보를 발령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복지부 관계자는 “아직 세팅이 덜됐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1월 법이 공포된 후 6개월 동안 준비기간이 있었고, 7월 시행 후 150일이 가까워오는데 아직 준비가 덜됐다고 합니다. 기 의원은 1일 “도대체 보건복지부가 왜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습니다.
의료분쟁조정법도 안착될 수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의료계는 의료사고 강제 조정규정으로 위험한 환자는 의사들의 거부로 오히려 더 치료받기 힘들게 하는 ‘환자 죽이는 악법’이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전공의 특별법 역시 전공의 근로시간을 주당 80시간을 낮추는 핵심 규정은 대형병원들이 준비가 덜됐다는 이유로 법 시행 후 1년 뒤에야 적용됩니다.
환자안전법 제5조1항은 ‘모든 환자는 안전한 보건의료를 제공받을 권리를 가진다’입니다. 수많은 의료관련법 중 최초로 환자가 주어로 들어간 법 조항입니다. 그만큼 우리 의료 현실은 환자는 주체가 아닌 객체에 머물러 있습니다. 병원에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도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4명의 아이들 중 병원에서 과실을 인정한 종현이를 빼고 나머지 3명의 아이들 부모님들은 지금도 힘겨운 법정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학병원들은 대형 로펌을 내세워 “과실이 없다”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5∼6년이 걸리는 소송기간과 막대한 비용, 공고한 카르텔(담합)을 구축한 의료계로부터 의료과실을 입증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는 “예강이의 경우 의료진이 예강이 사망 이후 수혈 및 맥박 기록을 조작한 것이 드러났는데도 과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면서 “의료사고 피해자가 대형병원과 싸워 이기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피해 아이들 부모님들이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그래도 어려운 싸움을 이어가는 이유는 진실 규명과 진심어린 사과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예강이 변론을 맡고 있는 이인제 변호사는 말했습니다.
“세월호하고 똑같아요. 사과하고 진실 규명하면 되는데 병원은 그렇게 안 해요.”
언제쯤 아이들의 희생에 의해 만들어진 의료사고 방지 3법이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세종=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