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가장의 근심] 아껴서 읽고 싶은 착한 에세이

입력 2016-12-01 17:45
에세이 ‘가장의 근심’을 낸 문광훈 교수. 가르치려 하지 않고 지적 수준을 과시하지 않는 태도가 더 큰 감동을 준다. 에피파니 제공
“산문집을 내는 것은 청년 시절 이후 오랜 열망이었다. 그 열망 하나가 이제 이뤄진 것이다. 아무런 강요나 명령 없이도 스스로 쇄신해가는 삶의 어떤 가능성을 나는 글로 모색하고 싶다.”

에세이마저 체신을 잃고 TV프로그램의 볼거리로 소비되는 시대에 문광훈 교수(충북대 독문과)의 책 ‘가장의 근심’(에피파니)은 낯설게 다가갈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진중한 에세이다. 저자는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을 평생의 책무로 받아들이는 문학평론가다. 읽고 쓰는 것도 그렇지만, 숙성시킨 생각과 그런 생각이 길어 올린 성찰이 빚어낸 문장은 깊고 서늘하다. 다도하며 차를 음미하듯 더디게 읽고 싶고, 다시 곱씹고 싶은 문장들이 산재해있다.

무엇보다 남에게 이야기하기보다 스스로의 내면을 응시하며 깨달은 것들을 ‘골수에 스며든 문장’으로 쓴 것이 때문이다. 몇 개만 골라 읽어도 산문집의 고전적인 경지를 보여주는 깊이와 맛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삶이라는 수수께끼-처남을 보내며’에서는 처남의 죽음을 통해 삶의 불가해성과 근본적인 불충분성, 두려움에 대해 깨닫는다. “한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해 거의 낯선 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낯선 채로 죽어간다.” 삶의 비의를 느끼게 하는 이런 문장을 대하게 되면 괜히 옷깃을 여미며 잠시 문장 속에 머물게 된다.

표제작 ‘가장의 근심’은 유대계 독일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쓴 짧은 글 ‘가장의 근심’을 빌어 도무지 부모 뜻을 따르지 않는 두 아들을 키우며 겪는 가장으로 살아가는 것의 힘겨움에 대해 적는다. 카프카의 글처럼 우리 시대 가장도 “종종 나무토막처럼 오랫동안 말이 없고, 이 나무토막처럼 보이는”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긴 자기 응시의 시간을 거치며 그는 자신이 자식의 고유한 정체성을 존중하는데 서툴렀음을 자각하게 되고 아이를 키우는 두려움 역시 삶의 기쁨의 일부여야 마땅하다고 나직이 말한다.

책은 이렇듯 나에서 출발해 삶과 인간을 이야기하고 예술과 철학에 대해 논하며 사회 문제를 들여다본다. 특히 문학평론가인 그가 읽은 무수한 책들은 우리 삶을 이해하는 방편이다. 제인 오스틴의 세태소설을 읽으며 사람살이의 허영과 자존심의 차이를 들여다보는 식이다. 그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보다 뛰어나다”고 단언한다. 그런 식견과 통찰을 나누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기쁨이다. 아껴 읽고 싶어지는, 요즘 시대 귀한 에세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