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에 소처럼 생긴 큰 짐승이 있는데, 눈동자는 붉고 꼬리는 없다. 떼를 지어 바닷가 언덕에 나와 누웠다가 혼자 가는 사람을 보면 해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 달아나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이를 가지(可之)라고 한다.”
신경준(1712∼1781)이 편찬한 ‘동국문헌비고’에 나오는 가지에 관한 기록이다. 여기서 가지란 바다사자의 일종인 강치를 가리킨다. 지금은 멸종됐지만 강치는 19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독도에 수만 마리가 서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환동해 문명사를 연구해온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는 이 책에서 독도의 주인이었던 강치가 불과 수십 년 만에 사라진 과정을 추적한다. 일본은 20세기 초반 활발했던 강치잡이가 독도 영유권의 증거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반문명적 범죄행위였다.
강치를 사냥하지 않은 우리 선조들과 달리 일본은 17세기부터 독도로 건너와 불법 포획을 일삼았다. 1690년대 조선의 어부 안용복은 이에 두 차례 일본에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재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정확히는 동해에 면한 시마네(島根) 현과 돗토리(鳥取) 현은 독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특히 시마네 현 앞바다에 떠 있는 섬으로, 독도에서 약 160㎞ 떨어진 오키(隱岐) 제도 사람들은 독도를 지금도 잃어버린 땅으로 여긴다.
오키 제도를 답사한 저자는 이곳 사람들의 독도 인식을 ‘심성사(心性史)’적 관점으로 풀어낸다. 오키 사람들의 집단적 감성지도에는 독도, 즉 다케시마(竹島)가 자신들의 영토라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키 사람들은 일제가 한반도를 침략하고 독도를 시마네 현으로 편입하자 자신들의 생활 권역에 독도를 포함시킨 뒤 강치를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일본에 포획된 강치의 가죽은 가방이나 모자챙을 만드는 데 쓰였고, 어금니는 반지의 재료가 됐다.
그리고 몸의 지방은 기름으로 사용됐다. 오키 사람들의 야욕은 결국 강치의 멸종을 초래했다. 저자는 “강치 멸종은 독도 문제에서 후차적인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본질”이라며 “일본은 독도에서 자행한 대량학살극에 대해 반성문을 내놔야 한다”고 강조한다.장지영 기자
[책과 길-독도강치 멸종사] “日 불법 포획이 강치 멸종 이유”
입력 2016-12-01 17:45 수정 2016-12-02 0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