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칼럼] 한국판 딥스로트들, 이젠 말해야 한다

입력 2016-11-29 19:12

박근혜 대통령이 3차 대국민 담화에서 ‘질서 있는 퇴진’을 밝히고, 사익을 추구한 적이 없다는 주장을 했다고 의혹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대통령은 이미 피의자다. 제기된 의혹은 시시비비가 가려져야 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차고도 넘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최순실 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뒤틀린 구조를 고쳐야 말도 안 되는 범죄행위가 재발할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 그 구조의 중심에는 문고리 3인방과 함께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재직하며 권력을 휘둘렀던 김기춘씨가 있다고 본다. ‘세월호 7시간’의 대통령 소재에 대해 “모른다”고 시작한 그의 언급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최순실과 주변 인물들, 그들과의 만남 등과 관련해 “모른다, 아니다, 기억에 없다”는 부인도 구속된 차은택 송성각의 주장에서 흔들린다.

‘일도이부삼빽’ 형사 피의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다. 걸리면 일단 도망가고, 잡히면 ‘모른다, 아니다’ 부인하고, 그래도 안 통하면 마지막으로 ‘빽’을 쓰는 것이다. 범법행위로 신문 1면을 장식하는 인물들이 이런 절차를 따라 했던 적이 많고, 성공사례도 꽤 있으니 쓸 만한 고전적 수법이라 하겠다. 김기춘은 대표적 대한민국 공인이다. 그 이름과 생김새를 다 아니 변장하고 밀항하지 않는 한 국내에서 피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자신이 무소불위 권력이었지만 지금은 그에게도 권력의 빽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남은 게 무조건 부인인데, 요 항목을 충실히 따르는 것 같다.

관련 언급 내용을 세세하게 표로 만들어보면 그의 말이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최고의 법률기술자다. 법으로 피의자를 옭아매는 방법, 법망을 피해가는 전략에 능할 것이다. 그러니 딱 드러난 것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할 게다. 부역했다는 비판이나 무능하다는 조롱쯤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주 들어서는 “대통령이 지시해서”라는 언급까지 밀렸다. 이미 기능을 못하는 대통령에게 쓱 떠넘기는 것 아닌가. 부인할 수 없는 정황이나 증거가 더 드러나면 어떤 표현을 할지 궁금하다. 어떤 교수는 그를 법비(法匪·법을 악용한 도적)라 칭했고, 어떤 정치인은 법률 미꾸라지라고 표현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법률적 지식과 수사 경험 등으로 익힌 기술로 여러 불리한 정황을 지우고, 없애고, 관련자들에게 유리한 언급을 해주도록 권유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이를 밝히겠다는 검찰의 의지다. 음덕을 입은 검사들이 한두 명이겠나.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힌 사람들이 은밀하게 진행된 일들을 굳이 밝히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어려운 일이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워싱턴포스트의 워터게이트 취재는 별명 ‘딥스로트(deep throat)’라는 익명의 내부제보자로부터 시작된다. 기사 방향이 틀리거나 더 나아가지 못할 때 딥스로트는 결정적 제보를 보탠다. 신문은 점점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33년이 지난 2005년, 딥스로트의 가족에 의해 그가 연방수사국(FBI) 부국장이었음이 공개된다.

이제는 장막 뒤를 알고 있는 한국판 딥스로트들이 진술을 해줘야 한다. 단죄가 목적이 아니다. 봉건시대나 일어날 법한 일들이 왜 일어났는지, 그런 일을 위해 공적 시스템이 얼마나 허망하게 사용됐고 무력화됐는지, 공직 인사가 그동안 어떻게 뒤틀렸는지 알려져야 한다. 문제 해결 출발점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그 지점이다.

정의는 가끔씩만 이긴다. 안타깝게도 불의한 권력이나 기득권에 늘 이기지 못한다. 세계 역사를 봐도 그렇고, 한국 현대사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가끔 거대한 힘이 작용하거나 결정적 증언이 있으면 정의가 이길 때가 있다. 지금이 그때다.

김명호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