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소설은 철저하게 인과론의 자장 안에서 움직인다. 보잘것없는 생을 살아온 농부의 엉뚱한 행동에도 다 그만한 이유가 존재하고, 도시 속 수많은 연인의 이별에도 제각각의 사연이 깃들어 있다. 만약 그런 원인이 거세된 이야기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현대소설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 대개 전근대 소설이 놓여 있는 자리가 그러한데,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은 대개 산신령이나 구렁이 같은 존재가 갑작스럽게 튀어 나와 결론을 대신해주곤 한다(우리 TV드라마는 산신령을 재벌 2세로 대체한 장르이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말하는, 운명이라고 말하는 순간에는 대개 사라진 원인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는 법이다.
철저하게 원인과 결과의 법칙 아래 이루어진 현대소설에서 그래도 더 중요한 것은 원인이다. 사실 결과는 거기에서 거기일 경우가 많다. 누군가 죽거나 다치거나 헤어지거나 소망을 이루거나 좀비가 되는 일. 아무리 과격한 결과라 할지라도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지는 못하는데, 그건 아마도 우리 인간이 유한한 생명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원인은 좀 다르다.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태양 때문에 살인을 한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아니, 어떻게 태양 때문에 살인을 하지? 의아해하면서 소설을 읽다 보면 과연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이내 설득 당하게 만드는 이야기. 그래서 현대소설은 새로운 동기를 만들어내는 장르이기도 하다.
광장에 150만명이 모였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경찰 추산 집회 참석 인원과 주최 측의 계산이 너무 달라 인터넷에선 3.3㎡당 몇 명이 설 수 있고, 그래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참석 인원은 몇 명이다, 아니다, 당일 광화문 일대 지하철 이용 인원은 몇 명이니까 150만명이 맞는 것이다, 하는 식의 논쟁 아닌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객관적 결과에 집착하는 행위는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숫자’를 어떤 ‘용도’와 ‘프레임’으로 활용하기 원하는 세력들의 관심사일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원인은 150만명이고, 결과는 하야나 퇴진일 뿐이다.
하지만 광장에 나가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촛불을 든 사람들은 옆 사람의 머릿수를 세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마주하면서 자신이 서 있는 공간과 세계를 ‘감각’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때의 원인은 지금까지 우리가 봐온 것과는 결부터 다른 것이다. 그 원인과 동기를 고민해봐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동기. 결과는? 결과는 이미 중요하지 않은 게 되어 버렸다. 난생처음 접하는 호러 스릴러물이 아닌 바에야 퇴진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통령의 거짓말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지배 권력층의 무분별한 반칙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것이 원인이자 동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 이전에는 그런 일들이 없었던가? 따지고 보면 그런 일들은 빈번하게 우리 주위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진 않았다. 그때와 다른 무언가가 사람들을 광장으로 뛰쳐나오게 만드는 원인이 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떤 원인이 제대로 잡히지 않으면 결과에서부터 유추해 보면 될 일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광장으로 나오는 시민들. 거기에서 치유 받는 사람들. 그러니까 이번 일의 원인에는 바로 그런 ‘감각’의 문제가 숨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처 받은 감각에 대한 치유. 이것은 우리가 처음 접하는 집회의 동기이자 원인이다. 대통령은 바로 그 감각에 상처를 낸 사람이다. 그 감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 탓이 크다.
이기호(광주대 교수·소설가)
[청사초롱-이기호] 감각의 상처
입력 2016-11-29 1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