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월부터 중·고등학생들이 공부할 국정 역사 교과서에 박정희정부를 긍정적으로 서술한 내용이 대폭 강화됐다. 안보 위기를 내세워 군사정변과 독재가 불가피했다는 관점이다. 헌정질서 유린, 민주주의 파괴, 국민 억압 등 과오는 간략히 서술하고 경제 성장과 과학기술 증진은 자세히 설명했다. 역사학계가 친일 행위에 면죄부를 줄 우려가 크다고 비판해 온 ‘1948년 건국절 사관’ 내용도 당초 예고대로 실렸다.
복면을 벗은 집필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을 학생들에게 많이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해 온 이른바 비역사학 전공의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현대사 서술에 대거 포함됐다.
교육부는 28일 ‘올바른 역사 교과서’(국정 역사 교과서) 현장검토본을 공개했다. 중학교 역사①, 중학교 역사②, 고교 한국사 등 3권이다. 교육부는 다음 달 23일까지 여론을 수렴해 내년 1월 말 최종본을 결정할 계획이다.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갖고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는 역사관과 올바른 국가관을 가질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며 “역사적 사실과 헌법가치에 충실했고, 학계 권위자 집필진을 구성했다”고 말했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은 “청소년에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여주려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교과서는 박정희 시대를 ‘냉전시기 권위주의 정치 체제와 경제·사회 발전’이란 제목으로 261∼269쪽에 걸쳐 상세히 설명했다. 박정희정부 설명에 앞서 공산주의와 북한의 위협을 강조했다. 박정희정부가 수출위주 경제정책과 중화학 공업, 과학기술 육성을 통해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고도성장 목표를 달성하였다”고 썼다.
집필진은 당초 46명을 공개할 예정이었지만 31명 이름만 나왔다.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는 “역사 전공자라면 도저히 내용에 동의하기 어려워 (집필진에서) 뛰쳐나간 듯하다”고 말했다.
다수 교육감들은 불복종 운동과 자체 역사 교재 제작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역사전쟁’의 서막을 예고했다. 교육 현장은 극도의 혼란이 불가피해졌다.
485개 교육·시민단체 모임인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회원들은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국정 역사 교과서는 박근혜에 의한 박정희를 위한 효도 교과서”라고 규정하며 당장 폐기하라고 촉구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참교육학부모회 박이선 학부모는 “함량미달 교과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 전국적으로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말했다. 구로고 3학년 이찬진 학생도 “학생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해석할 권리를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보수 성향의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와 진보적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도 각각 비판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전교조는 오는 30일 연가투쟁을 시작으로 불복종 운동을 전개한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야당 의원들도 “밀실에서 음습하게 추진해 온 국정 역사 교과서를 당장 폐기하라”고 촉구했다.
반면 역사교과서대책범국민운동본부 이희범 사무총장은 “좌우의 교과서가 아닌 절충된 대한민국 교과서를 이번에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국민행동본부 서정갑 본부장은 “국정교과서가 상당 부분 균형적 시각을 담아냈다”며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이라고 표기하지 않은 데 아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새누리당은 “지난 1년간 학계의 권위자들로 구성된 집필진과 전문가, 현장 교육관들이 참여해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도경 이가현 최예슬 권지혜 기자hyun@kmib.co.kr@kmib.co.kr, 사진=김지훈 기자
국정농단 이어 ‘역사농단’ 논란
입력 2016-11-28 17:56 수정 2016-11-28 2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