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주의 1318 희망공작소] 자기 마음 지키기

입력 2016-11-28 21:10

수능을 열흘정도 앞둔 아이가 ‘멘붕(멘탈 붕괴)’이 왔다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스스로 학습목표를 정하고 스케줄을 짜면서, 수개월동안 흔들림 없이 공부에 집중하던 아이였기 때문에 내심 걱정이 됐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문제의 발단은 그날 낮에 봤던 뉴스의 한 장면이었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검찰에 출두하며 주변의 기자를 경멸하는 눈으로 째려보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 검찰조사를 받으면서도 여유만만한(?) 모습이 아이에게 무척이나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최근의 떠들썩한 사건과 뉴스들을 보면서 황당하고 분노했던 적이 많았지만 이번엔 느낌이 다르다면서 아이는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아무리 승승장구 성공한다 해도…저런 사람이 되면 어떡해요. 부끄러움을 모르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내가 저렇게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잖아요.”

자신이 목표하는 길을 먼저 걸어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의 민낯을 보면서, 아이는 실망과 분노를 넘어서 서늘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우 전 수석은 우리나라 최고의 학벌, 사법고시, 검사 임용 등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를 모두 밟아온 전형적인 ‘성공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민낯은 그야말로 후안무치(厚顔無恥), 자신의 행동에 대한 최소한의 부끄러움도 없어 보였다.

그런 우 전 수석을 보며 아이는 ‘저런 인간’을 향해 가는 것 같은 입시공부와 자신의 노력이 부질없다고 했다. 더욱이 지금 자신이 몰두하는 성취, 즉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제끼고 또 제껴야 하는 일을 계속 하다보면 자신도 어느 순간 ‘저런 인간’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을 털어놨다.

얼마 남지 않은 시험, 불안과 체력적 한계를 버텨야 하는 시점인데 어른들 잘못으로 심리적 혼란과 고민이 더 생긴 것 같아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아이의 고민이 반갑고 기뻤다. “나와는 상관없는 타인의 잘못일 뿐”이라 여기며 고민을 차단해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를 자신에게 적용하며 삶을 돌아보는 ‘성찰적 고민’을 하고 있어서였다. 그런 생각을 갖는 것, 고민하며 흔들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런 인간’이 되지 않을 가능성을 훨씬 높여준다고 판단했다.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듣고, 같이 한숨을 쉬며 대화했다. 아이는 이내 정서적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 아이가 계속 자신에 대한 성찰적 고민을 이어갈 수 있기를, 문제의식을 잃지 않고 적절한 때에 흔들리는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되기를 바랐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당부한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잠4: 23)

어떤 길을 걸어가든, 어떤 상황에 처하여 살아가든, 마음을 지키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살아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의 말처럼, 삶에서 가장 중요한 마음이 바로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를 돌아보는 성찰이다.

삶의 여러 사건들을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성찰의 마음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성찰이 사라지면 삶은 생명의 물줄기가 차단된 죽은 삶이 된다. 감사하게도 주께선 언제나 우리에게 성찰의 마음을 회복할 기회를 주신다. 그리고 성찰은 반드시 새로운 행동과 변화를 수반한다.

한영주 <한국상담대학원대 15세상담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