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창섭] 누진제 개선을 위한 원칙

입력 2016-11-25 18:38

누진제는 여전히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누진제만큼 수요 억제에 효과적인 제도는 없다. 이러한 징벌적 요금이야말로 수급 안정과 신기후 대응을 위해 도입돼야 하는 가장 좋은 방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극심한 기후변화가 누진제의 미덕과 사회적 합의를 깨뜨려버렸다. 기후변화로 냉난방 에너지 사용 여부는 건강과 생존의 문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나 간단히 아주 쉽게 완화 혹은 폐지될 것으로 낙관했다. 그러나 그다지 쉽지 않아 보인다.

현행 누진제를 완화하면 1구간, 2구간 소비자들의 여름과 겨울 냉난방 에너지 비용을 감소시키지만 봄, 가을철에는 전기요금을 인상시키는 효과가 있다. 즉 1, 2구간은 요금이 인상된다. 국민이 요구하는 누진제 완화 또는 폐지를 하려고 보니 누구나 행복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1, 2구간 소비자들에게 누진제 정상화로 그들의 요금이 인상될 수 있음을 용감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정치권은 표 잃는 행위를 본성적으로 싫어한다. 게다가 전기요금은 교차보조, 도소매가격 괴리, 종별 형평성, 지역별 형평성 등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로 확장되기 쉬운 휘발성 강한 까다로운 이슈이기도 하다. 당이나 정부나 굳이 고생하며 앞장서고 총대를 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정부는 그간 논쟁이 되었던 누진제 개선 방안의 골격을 발표했다. 기본적으로 현재 6구간을 3구간으로 줄이고 배율도 12배에 가까운 것을 3배 이내로 조정한다는 것이다. 드디어 지루한 논쟁이 마무리될 모양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개운하지만 않은 것도 사실이다. 예상되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 주택에 원가 이하로 전기를 공급키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원가 이하로 공급한다면 당장은 호응을 받겠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포퓰리즘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공짜 점심이 없다는 것은 항상 진실이기 때문이다.

요금은 에너지 사용에 대한 경제성과 형평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이슈로서 몇 가지 일관된 원칙이 요구된다. 첫째는 일관되게 소비자 단체가 주장하듯 ‘정당한 요금에 쓴 만큼 낸다’는 원칙이다. 원가가 무엇인가 등에 대한 논쟁이 있긴 하지만 원가를 근간으로 요금이 형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로 이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누진제는 여전히 장점이 있으므로 지나치게 급격한 변동은 곤란하다. 따라서 폐지보다는 완화가 타당하다. 그런 면에서 구간과 배율 축소를 결정한 것은 다행이다. 셋째로 만약 1, 2구간 요금 인상으로 힘들어지는 소비자가 있다면 그것은 전력산업기반기금으로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 요금과 정책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1, 2구간의 부유한 1인 가구가 계속해서 정의롭지 못한 혜택을 받게 될 우려가 있다. 마지막으로 교차보조의 근절이다. 상당 기간 주택이 공장을 도와준 것이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지금은 산업계가 원가 이상의 요금을 지불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누가 누구를 인위적으로 도와주는 혹은 메워주는 방식은 곤란하다.

지금 논의되는 누진제 당정 TF의 안은 1, 2구간의 낮은 요금은 그대로 두고 누진율만 완화하자고 하는 것이다. 만약 싸게 공급하는 것이 진정 국민을 위한 일이라면 전기를 공짜로 주자고 주장하는 것이 더 확실한 것 아닌가. 공짜 점심은 없다. 우리 국민은 의외로 합리적이다. 다만 원칙을 기반으로 하여 소상히 설명하고 진솔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면 원만하게 수용될 것이다.

김창섭 에너지IT학과 가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