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이성규] 구신녀와 모피아

입력 2016-11-24 17:33

국세청 내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청장도 아니고 차장도 아니고 ‘구신녀’라고 한다. 구신녀는 ‘9급 신규 여직원’의 줄임말이다. 이들은 대부분 철저한 원칙주의자여서 세금 업무 특성상 외부 민원에 어느 정도 융통성을 갖고 업무를 해온 기존 관행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세무서장들도 이들에게 민원성 지시를 해야 할 때면 다른 부하직원들과 사전에 상의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구신녀의 반대쪽 끝에는 ‘모피아’가 있다. 모피아는 옛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출신 정통 경제 관료를 마피아에 빗댄 말이다. 이들은 공직사회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를 패스한 뒤 사무관으로 공직에 발을 내디딘다. ‘한 번 모피아는 영원한 모피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서로 밀어주고 끌어준다. 1급 고위 공무원, 장·차관을 거친 뒤 금융·공공기관 CEO(최고경영자)로 변신하는 게 기본적인 인생 코스다. 1980년대 금융계 인사들이 연예인을 데리고 와서 재무부 금융정책국 소속이었던 모피아를 접대했다는 이야기는 기재부 내에서 전설처럼 회자된다.

두 집단의 공통점도 있다. 절실하게 무언가를 추구한다. 구신녀들은 학벌이 낮아서, 여성이어서, 최순실씨 같은 엄마를 못 둬서 노량진 고시학원에서 컵밥을 먹으며 시험에 매달렸다. 올해 국가공무원 9급 공채시험에는 역대 최대인 22만명이 몰렸다. 최종합격자는 2591명이었으며 이 중 절반이 여성이었다. 100대 1에 가까운 경쟁을 뚫은 이들이 손에 쥐는 초봉은 월 134만6000원이다. 30년 넘게 일해도 모피아의 첫 직위인 5급 사무관까지 승진하고 퇴직하는 경우는 열에 한둘 정도다. 풍족한 경제적 여유와 높은 자리에 오를 가능성은 적은 셈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공직은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최후의 보루다. 눈치 안 보고 육아휴직을 할 수 있고, 규정대로만 일하면 잘릴 걱정이 없다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낀다. 한 9급 여성 공무원은 “인턴에 비정규직을 거쳤다. 공무원 합격 전 사회생활은 상처뿐이었다. 이제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왜 윗사람들이 원칙에 어긋나는 민원성 지시를 해서 소중한 인생의 보루를 흔들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모피아도 절실하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눈에 들어야 하고, 시킨 일은 어떻게 해서든 완수해야 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대기업 오너를 협박해야 하고, 목적이 불분명한 재단을 서둘러 출범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한다. 규정과 원칙은 나중 문제다. 국민의 공복(公僕)이기보다는 대통령의 사노(私奴)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야 선배들이 내놓은 ‘비단길’을 따라 밟을 수 있다. 먹고사는 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나랏돈으로 기사 딸린 차를 타고 밥을 먹는다. 강남에 집 한 채는 기본이다.

구신녀란 말에는 어감상 ‘귀신같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좋은 게 좋은 것이고 둥글게 사는 게 정답인데 왜 그리 피곤하게 사느냐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정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모피아들을 보면 이들이 진짜 귀신같다. 귀신에 홀린 듯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국정을 농단한 비선실세들의 행동대장 역할을 자처했다. 엘리트 관료들은 정권마다 정책 방향이 바뀌는 현상을 비판하면 국정철학을 따르기 위해서는 ‘공무원은 (어쩔 수 없이) 영혼이 없어야 한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보듯 공무원은 영혼을 지켜야 한다. 구신녀 같은 모피아를 보고 싶다.

이성규 경제부 차장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