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외교관 와카마쓰 도사부로(若松兎三郞, 1869-1953)는 1902년 7월부터 1907년 4월까지 목포주재 일본영사로 근무했다. 와카마쓰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말씀을 평생 가슴에 새겼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십자가 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전남 목포시 고하도에 육지면화를 심어서 재래면화를 대체했다. 두 배 많은 면화를 생산해 지역 농가 소득증대에 기여했다. 또한 천일염 제조법을 보급해 30%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양의 소금을 생산했다. 가격경쟁력을 회복하면서 중국산 천일염을 대체했다. 우리 어민의 삶을 풍요롭게 한 셈이다.
와카마쓰는 1927년 고향 교토(京都)로 돌아갔다. 교토에서 그는 조선 그리스도인 편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923년 교토에 살던 조선인 주부 최점숙과 김수련 성도가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교토교회의 시작이었다. 1925년 교토대학 의학부 연구생 최명학이 예배를 인도하면서 교토교회는 정식으로 창립됐다. 최명학은 고베(新戶)중앙신학교를 다시 졸업한 뒤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30년 초대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1935년 조선인 교회당 교토교회를 완공했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교토교회당을 폐쇄하고 조선인 신자들을 특별감시 했다. 일본의 전통과 역사를 보전하고 있는 교토에 조선인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수치라는 명목에서였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최 목사와 박상동 성도는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3·8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112명이나 되는 조선인들이 목숨을 잃고 87명이나 부상을 당한 만세운동이다. 최 목사는 주동자로 옥에 갇혔다. 박상동 성도는 6년이나 옥고를 치렀다.
와카마쓰가 그들의 편에 섰다. 일본으로 돌아가 도시사대학(同志社大學) 교무부장을 맡고 있던 그는 교토 지사와 경찰서장을 설득했다. 최 목사가 설립했지만 폐쇄됐던 교토교회의 재창립을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와카마쓰에겐 “이 문제로 자꾸 충돌을 일으키면 신상에 좋지 않다”는 교토경찰서의 위협도 통하지 않았다. 5년 뒤 그의 노력은 결국 결실을 맺었다. 1940년 4월14일 교토교회는 입당 예배를 드리며 다시 문을 열었다. 같은 해 10월20일에는 성찬예식도 드렸다. 와카마쓰에겐 자기 민족보다 그리스도 공동체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최석호<목사·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
[최석호의 골목길 순례자-와카마쓰 도사부로] 신앙은 민족보다 강하다
입력 2016-11-25 2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