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갇혀있던 페미니즘, 광장에서 외치다

입력 2016-11-25 04:05
지난 5월 17일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후 10번 출구 앞에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글과 꽃들이 가득 쌓여있다(위). 5월 20일 신촌 광장에서 한국여성민우회 주최로 열린 ‘여성 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서 참가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으며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출판사 궁리 제공

최근 토요일마다 광화문 광장에는 ‘박근혜 퇴진’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모이고 있다. 100만명 안팎이 밀집했지만 과거와 달리 물리적 충돌 없이 평화적인 시위가 이뤄졌다.

하지만 외신에까지 보도된 ‘세계에서 가장 폼나는 시위’라는 세간의 찬사와 달리 SNS에는 광화문 집회에서 성추행과 외모품평을 당했다는 여성들의 피해 사례가 속속 올라왔다. 실제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성추행 범죄를 자랑하는 남성들의 글이 올라왔으며, 몇몇은 현장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여기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광화문 집회에서건 인터넷에서건 여성비하 또는 혐오 발언이 넘쳐나는 상황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을 그저 부패한 권력자와 기득권층이 아니라 ‘XX년’ ‘강남 아줌마’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 등 여성으로 대상화해 저급한 욕설을 쏟아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여성들은 허탈함과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여성들 사이에선 멸시와 차별, 폭력에 맞닥뜨리는 광화문 집회는 결코 평화 시위가 아니라는 자조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이 같은 이유로 최근 숙명여대에는 ‘내가 시위에 가지 않은 이유’라는 대자보가 붙었고, 페미니즘 커뮤니티 ‘바람계곡의 페미니즘’은 광화문 민중총궐기 집회에 여성이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한국여성민우회가 엮은 ‘거리에 선 페미니즘’은 주목할 만하다. 광화문 집회의 씁쓸한 이면이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여성비하와 혐오는 위험 수준에 이르고 있다. 지난 5월 17일 강남역 인근 상가 화장실에서 한 20대 여성이 살해당했다. 이는 우리 사회에 여성혐오 논란을 일으킨 대표적 사건이다. 당시 가해자는 화장실을 이용하는 남성 7명을 보내고 처음으로 들어온 여성을 살해했다. 그리고 경찰에 “여자들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아 홧김에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비록 이 사건에 대해 검·경 등 수사기관과 재판부는 여성 혐오가 아니라 피해망상 등 조현병(정신분열증)에 의한 범죄로 결론을 내렸지만 여성들에게 여성혐오 범죄를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됐다.

실제로 사건 직후 여성들은 절망하고 분노했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강남역 10번 출구 앞은 추모 포스트잇으로 뒤덮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앞선 여성 살해나 폭력 사건과 달랐다. 여성들은 공감, 애도, 분노를 넘어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라면 한 번 쯤은 당해봤던 폭력을 떠올렸고, 여성 폭력이 가해자 개개인의 일탈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로 개입되어야 하는 이유와 배경, 변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토론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책은 한국여성민우회가 지난 5월 20일 신촌 광장에서 개최한 ‘여성 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나는 00에 있었습니다’의 기록이다. 당시 오후 5시부터 사건이 발생한 시간인 새벽 1시까지 8시간 동안 릴레이로 약 50명이 발언을 했다.

책에는 발언자들의 연설문 42개가 실려 있다. 하나같이 성추행과 성폭력 경험, 외모로 인한 압박과 옷차림에 대한 검열 등 여성으로서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털어놓았다. 강남역 사건이 특수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자각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여성 차별과 비하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위해 싸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최근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성폭력 고발이 잇따라 일어난 것은 그동안 침묵했던 여성들이 변화를 위해 나섰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항상 낯설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여성은 여성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여성을 여성으로 규범화하고 일반화하려는 모든 시도들이 여성 혐오라는 것을 말이다. 여성은 물론 남성들이 좀더 읽어줬으면 좋을 내용이 많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과 남성 모두를 위한 것임을 이 책은 보여준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