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정치적인 것을 추동하고 있다.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진영 프레임으로 작동한다. 집단적 분노가 분출되고, 상대는 적이 되며 상대가 제거될 때까지 부정하고 버티며 싸운다.
동지는 친박 진영이며, 적은 촛불 민심과 그 민심에 응답하는 언론, 검찰, 야권, 비박계다. ‘인민재판’ ‘마녀사냥’ ‘바람이 불면 꺼져버릴 촛불’ 등의 발언은 진영을 깔끔하게 둘로 갈랐다. 정치적인 것의 덫에 걸린 상대도 계엄령 발언으로 맞불을 놓았다. 하지만 4차 촛불집회는 정치적인 것에 휘말리지 않았다. 검찰이 대통령의 공범 사실을 적시하고 피의자로 규정하자 청와대는 검찰의 공소장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향후 검찰조사를 거부했다. 이후 탄핵 정국이 전개됐다.
청와대가 처음부터 정치적인 것을 추동한 것은 아니었다. 청와대는 3차 촛불집회 이후 본격적으로 막장드라마를 개시했다. 심리전일까. 막장드라마의 악역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냐’면서 점점 더 빠져드는 것과 같은 심리다. 국민은 청와대의 막장드라마의 늪에 점점 더 빨려들었다. 흥행 성공일까. 하지만 막장드라마의 결말은 비극이다.
정치적인 것에 기초한 청와대의 막장 드라마도 그럴 것이다. 청와대가 국가 안의 국민을 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비극이다. 적과 동지의 구분에 따른 전쟁상태에서 상대는 제거돼야 한다. 자신의 존재방식만이 정당하기 때문이다. 생존이 중요하며, 양심과 윤리는 사라진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비정상적 국면을 정상화할 수 있을까. 본래적 ‘정치(politics)’가 복원돼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정치란 공동체의 공적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정의, 자유와 같은 윤리적 선(善)에 기초해 함께 이야기하고 합의해서 질서 있게 행동하는 일련의 소통의 과정이다. 서로 인정하지 못하고 제거하려는 정치적인 것의 프레임과 다르게 정치는 타자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서로 충분히 논의하고 검토하며 합의하는 과정인 것이다.
시민사회의 1차 촛불집회는 이렇게 윤리와 결합된 본래의 정치에 입각해 시작됐다. 윤리와 결합된 정치의 촛불이 타올랐던 것이다. 그것은 헌법을 위반한 대통령을 향한 정치윤리적 압박이었다.
촛불집회는 친박 진영의 ‘정치적인 것’에 의해 오염되기도 했지만 ‘정치’를 견지했다. 촛불을 든 국민은 대통령의 헌법유린이라는 공적 사안에 대해 정의와 자유의 가치에 입각해 소통하고 대통령의 퇴진이라는 합의를 도출했으며, 그에 따라 질서 있게 행동했다. 대통령 한 사람의 특권적 자유를 지켜주려는 청와대의 정치적인 것을 넘어 공화주의적 정치를, 즉 자의적 권력을 통제하는 정치를 외쳤던 것이다.
박근혜정부는 도덕과 윤리로부터 분리돼 권력의 획득, 유지, 확장에만 몰두하는 마키아벨리식의 현실정치 민낯을 보여줬으며, 그 파렴치한 부분을 가리려고 슈미트식의 정치적인 것을 동원하고 있다.
정치권은 촛불집회가 발견한 ‘정치’를 복원해 ‘정치적인 것’에 입각한 청와대의 진영 프레임을 타파해야 할 것이다.
장준호 경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특별기고] 촛불이 밝힌 정치를 복원하자
입력 2016-11-27 1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