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국내에서 현직 대통령의 탄핵 심판이 이뤄진 건 2004년 3∼5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사례가 유일하다. 당시 헌재는 국회의 탄핵 요구를 기각하면서 대통령을 임기 중 파면할 수 있는 사유를 최초로 제시했다. 헌재가 결정문에 서술한 이 조건들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의 결과를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전망이다.
“대통령이 국민 배신하면 파면”
국회는 그해 3월 “노 전 대통령이 공무원으로서 정치적 중립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며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탄핵소추(訴追)안을 통과시켰다. 노 전 대통령이 언론 등을 통해 당시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고, 이를 경고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에 유감을 표시하고, 자신에 대한 재신임을 요구한 것 등이 탄핵 청구 사유였다. 헌재는 그해 3월 12일 이후 7차례에 걸쳐 변론기일을 연 뒤 5월 14일 국회의 청구를 기각했다.
당시 헌재는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은 그 파장이 지나치게 크다”며 “이를 압도할 수 있는 중대한 법 위반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전제했다. 헌재는 결정문을 통해 탄핵할 수 있는 ‘중대한 법 위반’ 행위의 예를 하나하나 나열했다. ①대통령이 헌법상 권한과 지위를 남용해 뇌물을 받거나 공금 횡령 등 부정부패 행위를 할 경우, ②명백히 국익을 해하는 활동을 할 경우, ③국회 등 다른 헌법기관의 권한을 침해할 경우, ④국가조직을 이용해 국민을 탄압하는 등 기본권을 침해할 경우, ⑤국가조직을 이용해 부정선거 운동을 하거나 선거 조작을 꾀하는 경우다.
헌재는 “대통령 직을 유지하는 것이 헌법수호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거나, 대통령이 국민의 신임을 배신해 국정을 이끌 자격을 상실한 경우에만 대통령을 파면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 기준에 따라 당시에는 노 전 대통령 탄핵 요구를 기각했다. 노 전 대통령의 행위가 법치국가의 근본을 뒤흔들 정도로 중대한 법 위반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재판관 7명 이상 참석해야
법조계에서는 “박 대통령의 행위는 파면 조건에 상당 부분 부합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국정농단 사태의 핵심 피고인 최순실씨 등 3명과 박 대통령을 공범으로 보고 박 대통령을 피의자로 입건했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수사기관이 박 대통령을 부정부패 공범으로 지목하고, 매주 시민 100만여명이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여는 상황은 ‘대통령이 국정을 담당할 자격을 상실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국회가 박 대통령 탄핵안을 의결할 경우 헌재가 신속심리를 진행하면 두세 달 안에 결정이 나올 수도 있다. 노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은 64일 만에 결론이 나왔었다. 다만 박한철 헌법재판소장과 이정미 재판관 임기가 각각 내년 1월, 3월 끝나는 상황이라 후임 재판관 인선(人選)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탄핵 심판은 헌법재판관 9명 가운데 6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최소 심판정족수는 7명이다. 박 소장과 이 재판관의 후임 인사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남은 7명의 재판관 중 1명이라도 중도 퇴임하는 등의 변수가 생긴다면 심판 선고 자체가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글=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
“헌법수호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거나 국민의 신임을 배신해 국정을 수행할 자격을 상실한 경우”
입력 2016-11-23 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