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 낙안읍성, 고향처럼 푸근, 사람 냄새 물씬

입력 2016-11-24 00:05
전남 순천 낙안읍성의 초가지붕이 저녁 무렵 밝혀진 가로등 불빛과 어울려 고향 같은 정겨운 모습을 자아내고 있다. 아래 작은 사진은 초가지붕에 아기자기한 박이 영글어가고 있는 장면.
사람 향기가 물씬 나고 고향처럼 푸근한 곳이 있다. 성곽길 따라 걸으며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가집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아득한 어린 시절 추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농촌에서도 초가집 보기 힘들어진 요즘,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이 예쁜 집들은 참 흥미로운 볼거리다.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마을이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읍성이다. 전남 지역 특히 낙안은 평야가 많아 이를 노리는 왜구들의 침입이 잦았다. 1397년 토성으로 축조했으며, 1424년 조선 인조 때 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고 한다. 성곽 안에는 1536년에 지은 객사를 비롯해 ‘낙민루’와 동헌, 9채나 되는 향교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201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새로 지어 만든 초가마을이 아니라, 성 안에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실제 살고 있다는 점이다. 수백년 동안 같은 집, 같은 골목, 같은 마당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곳이다. 옛 성안에 사람이 사는 곳은 이곳 낙안읍성과 전남 진도의 남도석성 정도다. 이러니 성 안에는 사람의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전시를 위해 빈 초가집만 덩그러니 들어앉은 것과는 완전 다른 분위기다. 그래서 성과 마을이 함께 국내 최초로 사적(제302호)으로 지정됐다.

‘즐겁고 편안하다(樂安)’는 마을 이름처럼 초가 사이를 걷는 것으로도 위안이 된다. 초가지붕들 사이로 돌담 골목이 요리조리 이어지고, 수령 300∼400년의 거대한 은행나무·팽나무 등이 곳곳에 서서 볏짚 사이에서 살아온 주민들의 일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돌담길 따라 걸으며 마을을 기웃거린다.

초가집 마루에 앉으면 담장을 넘어온 늦가을 햇살이 부드러운 선으로 남는다. 동헌(관아) 마당을 거닐며 늦가을 볕을 즐기고 객사에 앉아 게으름도 부린다. 시간을 거슬러 오른 듯한 착각도 즐겁다. 객사 뒤편 하늘로 치솟은 팽나무도 잊지 말고 구경한다. 시간이 갈수록 그 옛날 흥성거림이 오롯이 살아나 가슴이 절로 벅차다.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함께 호남의 명루로 꼽혔던 낙민루 등도 볼거리다. ‘박의준가옥’ ‘이한옥가옥’ ‘임대자가옥’ 등도 기억한다. 천천히 살피면 같은 듯 각각 다른 구조와 형태가 이마를 ‘탁’ 치게 만든다. 화려하지 않지만 은근하게 끌리는 초가집의 매력을 알게 된다.

성곽을 밟으며 걸어도 좋다. 성곽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은 또 다른 감흥으로 다가온다. 허술한 담장 하나 없는 성곽은 1.4㎞를 이어가며 마을을 보듬고 있다. 북쪽을 빼고 동·서·남쪽에 문이 있다. 동쪽에는 ‘즐거움이 넘쳐나는 누대’를 의미하는 낙풍루(樂豊樓), 남쪽에는 읍성 성문치고는 규모가 큰 쌍청루(雙淸樓)가 있다. 서문은 소실돼 사라졌다.

쉬엄쉬엄 걸어도 한 두 시간이면 성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멀리 야트막한 산들이 감싸 안아 분지를 만드는 자리에 고요한 마을 풍경이 아름답다. 초가지붕 다닥다닥 붙은 서정적 풍경은 가슴을 울컥하게 한다. 저녁밥 지을 무렵이면 감정은 더 고조된다. 초가마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한다. 역사 드라마의 촬영장을 찾은 듯한 마을이 아담하다.

서문 터에서 쌍청루로 이어지는 길은 최고의 전망대다. 성을 사이에 두고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성안에 90여채, 성 밖엔 성곽에 바짝 붙어 40여채의 초가가 몰려 있다. 들판은 황금빛 물결을 끝내고 겨울채비에 들어갔다.

늦가을에 낙안읍성을 찾는다면 초가집 이엉을 엮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미리 이엉을 엮어 두었다가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을 택해 마을 사람들이 전부 품앗이를 통해 이엉을 올리는 모습은 정겨움을 넘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실제 주민이 거주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일부 가옥은 출입이 제한되기도 하지만 마을 곳곳에서 ‘짚물 공예’ ‘도자기 체험’ ‘민속놀이’ 등 다양한 체험도 가능하다.

순천에서 시간을 거슬러 추억 여행을 떠나기 좋은 곳으로 남제골 벽화마을도 있다. 실개천이 흐르는 아담한 마을에 복개 공사가 시작되고 이곳에서 자취하던 대학생들이 거처를 옮기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이들이 옛집 담벼락에 벽화를 그렸다. 실개천을 생각하며 물고기와 주민들의 삶을 담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 다시 남제골을 찾았고, 알콩달콩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450m 남짓한 길에서 마음이 넉넉해진다.













순천=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