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노석철] 대통령과 국민의 치킨게임

입력 2016-11-21 17:25

현재 탄핵 위기에 몰린 박근혜 대통령을 애초 거물 정치인으로 키운 건 아이러니하게도 차떼기 사건과 탄핵이었다. 2002년 대선 전 한나라당이 현금이 가득 실린 2.5t 트럭을 통째로 받은 사실이 드러나 국민들을 경악시켰다. 이후 탄핵까지 겹쳐 한나라당은 2004년 4·15총선에서 침몰 직전이었다. 이때 박 대통령은 ‘천막 당사’와 ‘붕대 투혼’으로 전국을 돌며 호소해 한나라당에 121석을 안겨줬다.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선거마다 돌풍을 일으킨 박 대통령은 아무도 범접 못할 위력을 가졌다. 그가 등 돌린 정치인은 살아남기 힘들다는 푸념도 나돌았다. 당시 그는 ‘원칙’과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포장됐지만 불통과 고집, 버티기의 고수라는 혹평도 뒤따랐다. 그와 협상해본 정치인들은 ‘벽 보고 얘기하는 것 같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기자들조차 거슬리는 질문을 했다가 ‘레이저’를 맞기도 했다.

그런 박 대통령이 100만 촛불에 맞서 국민들과 치킨게임을 선언했다.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는 취지다. 청와대는 박 대통령을 공범으로 지목한 검찰에 ‘인격살인’이라며 수사까지 거부했다.

그런데 검찰이 굳이 인격살인할 이유는 없다. 검찰은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혼외자 사건으로 쫓겨난 뒤 완전히 순치됐다는 자조에 빠졌다. 이후 검찰은 청와대의 뜻을 거스른 적이 거의 없다. 최근 우병우 전 민정수석 ‘황제 수사’ 논란까지 불거졌다. 그런 검찰이 임명권자에게 비수를 들이대는 건 임계치를 넘어섰다는 뜻이다.

청와대는 또 ‘대통령의 선의’란 표현을 썼다. 박 대통령이 대기업들에 774억원을 내도록 하고, 롯데에 70억원 추가 출연 요구를 한 것이나 최순실씨 측근 회사에 대기업 광고를 몰아주고 딸 친구 부모의 일감을 따준 것도 선의인가. 최씨에게 각종 국가기밀까지 보내준 게 ‘도와준 인연’에 대한 보답인가.

검찰 발표내용 외에도 의혹은 산더미다. 우선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은 최씨 딸 정유라의 승마 판정시비를 공정하게 처리하려다 쫓겨났다. 박 대통령에게 ‘나쁜 사람들’로 찍혀 영문도 모른 채 날벼락을 맞았다. 그 후 문체부는 최씨 일당의 민원창구로 전락했다.

이화여대는 쑥대밭이 됐다. 최씨의 딸 정유라의 입학과 학점을 위해 최소 18명의 교직원이 극진히 뒷바라지했다. 이화여대가 최씨만 보고 이런 엄청난 일을 벌였을까. 박 대통령의 입김이 작용했는지 반드시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CJ그룹도 먹잇감이 됐다. CJ그룹 이미경 전 부회장은 정권에 불편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미국으로 쫓겨났다. ‘VIP의 뜻’이란 한마디로 끝이었다. 동생 이재현 회장이 구속된 상태에서 그가 느끼는 공포감이 어땠을지 짐작이 된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도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사회 곳곳에서 벌어진 ‘권력 사유화’는 우리 사회의 룰과 상식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 자리에 불공정과 굴종만 남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개성공단 폐쇄, 국정 교과서, 위안부 합의안도 최순실 석자를 넣어야 퍼즐이 맞춰진다는 괴담이 계속된다.

가장 가슴 아픈 건 세월호 사건과 대통령의 7시간이다. 세월호 사건이 터진 지 2년 넘게 7시간을 묻는 건 사실상 금기였다. 이제 와서 청와대는 대통령이 당시 관저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럼 관저에서 뭘 했는지 아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수많은 의혹을 다시 정리한 건 박 대통령이 던진 치킨게임에서 패하지 않기 위해선 현재의 분노가 무엇 때문인지 늘 가슴에 새겨두자는 얘기다. 이번만큼은 세월호 사고처럼 초기에 울분을 토해내다 점차 잊어버렸던 무감각을 되풀이하지 말자.

노석철 산업부장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