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누구의 친구입니까

입력 2016-11-21 20:36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등장합니다. 잃은 양, 잃어버린 동전 그리고 탕자의 비유입니다. 세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 종교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세 가지 비유를 듣고 있는 사람들, 즉 예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는 대상이 누구인가에 주목하려 합니다. 특히 이야기가 탄생한 상황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야기 내용만큼 그 배경과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은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몰렸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던 사람들입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에게도 설 자리를 잃은 사람들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1세기 유대인들은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어른과 어린아이, 남자와 여자 등 구분 짓기를 하는 게 많았습니다. 구별을 통해 성(聖)과 속(俗), 안과 바깥을 나누고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으로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애당초 이런 나눔이 없었습니다.

세리와 죄인으로 불린 이들이 예수님께 나온 것은 이런 구분 짓기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든 아무 조건 없이 그저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맞이해주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중은 투덜댑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2절 후반)

이 말은 구분과 판단의 언어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기에 자신들처럼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리와 죄인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리와 죄인들은 누구도 항거하지 못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위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간절한 바람으로 찾고 기다리는 이야기를 통해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 선과 악, 성과 속의 구분이 아니라 아무 잣대와 경계 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고, 기꺼이 찾아나서는, 그래서 모두가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단 한 사람의 소외된 사람 없이 모든 생명이 함께 즐기는 생명의 잔치가 열리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것은 어쩌면 세리와 죄인을 넘어,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하고 있는 이들마저도 함께 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흔 아홉에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더해져 온전한 백(百)이 되고, 동전 아홉 개에 잃어버린 동전 하나가 더해져 온전한 목걸이가 되고, 기다리는 이들과 집 떠난 아들이 더해져 온전한 가족이 되는 나라. 그래서 결국 하나를 잃어버려서는 온전해 질 수 없는 세계임을 말씀하려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백이 되고 열이 되고, 한 가족이 되는 것의 근원에는 ‘사랑’이 오롯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사랑이 있는지요. 누군가 손가락질 당할 때 함께 손가락질 당해줄 수 있는지요.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 때문에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돼주셨습니다. 혹시 우리는 의인들의 친구가 되어 너도 나도 죄인들을 분별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앉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누구의 친구입니까.

박정인 목사 (안성 하늘씨앗교회)

약력=△협성대 사회복지학과, 협성대 신학대학원 졸업 △현 평택협동사회네트워크, 세상을배우는학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