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출애굽 여정에서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을 받았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실천하고 체험하는 장치로 회막과 제사, 안식일 준수, 레위기와 신명기의 율법 규례, 지파별 역할분담 등을 두었다.
그러나 구약의 역사에서 제사장과 선지자, 왕의 관계가 균형을 이루는 경우는 드물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병들기 쉬웠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제시했듯 구약역사는 타락과 징계, 회개, 회복이라는 패턴의 반복이었고, 이 과정에서 언약공동체는 교권주의와 관료화의 부정적 열매가 체질화되기도 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선민사상과 금기적 의무로 굳어버린 율법에 대한 창조적 파괴였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로 시작하는 팔복의 반전.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앙의 역설. ‘은밀한 중에 기도하고 사람에게 보이려 하지 말라… 공중의 새를 보라’ 등의 비유를 통해 전례와 염려에 갇힌 삶에 자유를 선포했다. 시간과 공간적 이해에 머물던 하나님 나라를 성육신 사건과 관계성이라는 새로운 지평으로 현재화했던 것이다.
미완으로 찾아온 일상속의 하나님 나라와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유효성을 재조명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으로서 교회가 우리의 실천적 운동이자 오래된 미래로부터 지금 여기로 찾아오는 신비한 은혜임을 일러주었다.
절박한 현실 가운데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한 초대교회는 성서의 역동성이 작동한 특별한 시기였다. 복음선포의 케리그마, 신앙양육의 디다케, 나눔과 교제의 코이노니아, 봉사와 실천의 디아코니아 등 미완의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장치로서 교회의 신조와 체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중세교회는 구약언약공동체의 교권화와 관료화를 강화시켰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앙의 신비주의 영성화 또는 사막교부화로 게토화시켰다. 500년 전 인문학의 부흥과 르네상스, 지동설과 신세계 발견 등 세계관의 전환을 가져올 때 부패한 교권주의와 교회 전통에 머물 수 없던 종교개혁가는 성서를 재발견하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새롭게 바라봄으로 저항인(Protestant)이 되어 개혁교회(Reformed Church)를 만들었다.
19세기 격동의 시기에 시작된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헌신적 복음전파는 물론 ‘의료, 교육, 독립운동’이라는 당시 우리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담당하면서 놀라운 부흥을 가져올 수 있었다. 교회는 새로운 삶을 만나고 희망의 원천을 발견하는 곳이었다. 적잖은 목회자의 생활이 신앙인의 본이자 신뢰의 상징이기도 했다.
복음이 시대와 사회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긴장감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 신앙은 신비주의와 교권주의라는 상하로 양극화되거나 혹은 내면화와 사회화라는 양극단의 좌우로 환원되기 마련이다.
시대적 성찰과 말씀의 역동성이 없는 현장에서 교회의 전통과 목회적 현실은 권력화, 관료화, 주술화, 세속화, 우상화, 이데올로기 등의 얼굴로 찾아온다. 주술적이고 사적 커넥션이 민주국가체계를 농단하는 시대, 탐욕과 부패의 그늘에서 생존의 염려와 상실에 허덕이는 백성의 자리에서,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쉼과 안식과 역사를 맛보고 참여하는 곳으로 존재하는가? 옥성삼<크로스미디어랩 원장>
[옥성삼의 일과 안식] 하나님 나라와 그 적들
입력 2016-11-18 2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