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어떻게 해야 잘사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질문의 의도는 잘못됐지만 그 내용은 중요합니다.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됐으며,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고 율법교사에게 반문하셨습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율법교사는 즉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대답이 옳다시며 그것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율법교사가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29절) 율법교사가 이번에는 자신이 그것을 잘 실천하는 사람임을 드러내려고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웃이란 자신이 정해놓은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대부분 유대인들만 울타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 질문의 의도를 간파하신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33∼35절)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통해 이웃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얼마 전 월드비전과 함께 수년째 가뭄과 기아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내륙의 잠비아를 다녀왔습니다. 현재 잠비아는 오랫동안 지속된 가뭄으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데, 아이들이 특히 치명적인 상태입니다.
제가 만난 아이들 대부분이 이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아이, 또 부모가 집을 나간 뒤 홀로 장애를 가진 동생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고 식량을 구하러 다니는 열세살 아이도 있었습니다. 시골로 갈수록 학교 문턱에도 못간 아이들이 대부분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제 눈에는 이 아이들이 이 시대의 강도 만난 자들의 모습으로 보여졌습니다.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고 고쳐 물으셨습니다. 율법교사의 이웃 개념 속에는 강도 만난 사람은 이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두가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입니다. 아무리 멀리 살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민족이나 혈연을 넘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가 모두 이웃입니다.
누가 이웃인지를 설명하는 말씀을 문자와 관념, 사색적으로가 아니라 삶으로 읽어야 합니다. 문자를 행동으로 변환시켜야 합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가서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리종빈 목사 (광주 벧엘교회)
약력=△영남대 성악과, 장신대 신대원, 영국 브리스톨대 졸업 △미국 리버티대(신학석사, 목회학박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북한선교연구소 서기 역임 △현 월드비전 광주지회장
[나눔설교]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입력 2016-11-17 2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