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1950년대 이전의 영화를 보는 일에 흠뻑 빠져 있다. 대부분 흑백 영화다. 아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USB에 편집해 주면 주일 내내 감상한다. 영화를 받기 위해 식당 또는 카페에서 아들과 만나 영화 얘기, 시사 얘기, 책 얘기로 부자유친(父子有親)하고 있다. 최근 화제는 박근혜와 트럼프, 두 대통령 얘기로 많이 옮겨졌다. 지지세력이 제법 있던 박 대통령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만큼 곤경에 빠졌다. 미국 대선에선 후보 같지도 않던 후보가 당선자 자리에 올랐다. 세상은 이 사건들을 돌발적 사태라며 놀라고 있는데, 실은 오래전부터 준비돼 온 게 아닌가 싶다.
지난 주말 아들과 명동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눈 다음, 북창동 옛길을 가로질러 서울광장을 통과해 광화문광장에 들어섰다. 촛불시위를 준비하는 군중을 비집고 경복궁역으로 향했으나 우리의 속도는 매우 느렸다. 30년 전 6월 항쟁을 떠올렸다. 그 시절의 ‘나’가 바로 아들의 나이였다면서 그때를 얘기해줬다.
우리는 진보하고 있는가, 인류는 인간의 가치를 이뤄내려는 의지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나는 늘 ‘지금으로선 아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아들은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젊었을 때의 나 역시 동의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나의 청소년기와 아들이 막 청소년기를 끝내고 있는 오늘의 세상을 영화를 통해 견주어 보면서 내린 나의 결론에 젊은 세대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절망의 늪으로 향한 욕망의 초고속 행진은 멈추지 않을 터이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이 절망적인 상황을 속히 깨달아 주지 않는다면, 돈과 권력에 딸린 명예만 탐하는 욕망의 노예들이 뽑은 두 대통령이 뽑은 자들에 의해 다시 조롱받는 아이러니는 계속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위선과 변명이 우리 주위를 유령처럼 떠돈 지 오래다.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도구는 ‘언어’요 ‘문자’요 ‘글’과 ‘책’이다. 뭉뚱그려서 ‘매체’ 또는 ‘미디어’라고 하는 것인데, 대부분 진정성과 힘을 잃어가고 있다. 거짓과 부풀림과 장삿속에 얼룩져 있다. 쓰레기를 닮은 글과 책이 장삿속으로 충만한 서점 귀퉁이에 쓰레기더미처럼 수북이 쌓여 있다.
박 대통령 말솜씨를 네 해 가까이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대통령 얼굴을 마주하고 출판문화정책을 개진한 적도 두어 번 있었다. 단정한 자세의 그분과 나 사이에 오간 짧은 말도 서로의 가슴에 스며들지 않음이 짙게 느껴졌다. ‘말’이란 생각의 반영이다. 그의 말이 어느 순간부터 공허하거나 진부하거나, 끝내는 위선의 반복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사무사(思無邪)’를 떠올렸다. 공자가 시경(詩經)으로 엮은 삼백 편의 시를 한마디로 정의해 ‘생각함에 있어 사악함이 없도다’고 했던 말이다. 대통령 임기 초부터 쏟아놓기 시작한 창조 어쩌구, 문화융성, 통일대박, 북한정권 붕괴 등 지도자의 언어에서 이해되지 않는 ‘사악함’이 힐끗힐끗 보였다. 창조나 문화는 하나의 객체가 아니라 삶의 각 분야에 소리 없이 스며 있기에 육안에는 잡히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갖가지 사업과 예산집행의 행태가 거짓과 과장과 비인간화로 치닫는 모습도 역연히 보였다. 측근으로 불리는 어두운 ‘그림자 인간들’과 함께였다. 그 후 드러난 문화사업 중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건립 쪽지예산 950억’ ‘국립한국문학관 무계획 450억’, 이런 공허한 사업을 겁도 없이 거창하게 분식해서 지자체 사이에 과당경쟁시키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내 시야에 비쳤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민주주의 선거로 뽑힌 대통령의 잘못은, 이제는 뽑은 자들과 보좌한 자들에게도 함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아들과 함께 광화문광장에서 중얼거린 단 한마디 외침이었다.
이기웅 열화당 대표
[시사풍향계-이기웅] 아들과 함께 광화문광장에서
입력 2016-11-16 1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