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 짙게 물든 날/숨 몰아쉬며/만대길 찾는다.//<중략>솔바람 정겹고/갯바람추억 만든다.//하늘 가려 울창한 곰솔나무/낯 설은 이 맞이하는 파도소리/굽이돌아 절경이라 흐르는/꾸지봉 보다 더 진한/감동의 빛깔이여….’ 2010년 당시 충남 푸른태안21추진협의회장이었던 고(故) 임효상씨가 쓴 ‘솔향기길’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태안에는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2007년 12월 7일 최악의 기름유출 사고가 그것. 크레인 바지선과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가 태안 앞바다에서 충돌하면서 시커먼 기름이 흘러나와 생명력 넘치던 바다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인근 어민들은 하루아침에 생활터전을 잃고 절망과 허탈감에 빠졌고, 끈적거리는 기름을 뒤집어 쓴 채 죽음을 맞이한 야생조류의 참혹한 모습은 재앙의 바다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오염된 해변에서 주민들이 기름을 퍼내고 닦아도 좀처럼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비보가 전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120여만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너나할 것 없이 달려왔다. 이들이 바위와 자갈·모래를 닦고 닦아서 마침내 맑고 깨끗한 앞바다로 돌려놓았다. 재앙의 바다가 소생돼 아름다운 옛 모습을 되찾았다.
태안군 이원면에서 태어난 차윤천(65)씨도 자원봉사차 고향에 내려와 함께 기름을 닦았다. 당시 자원봉사자들과 노인들이 앙뗑이(가파른 언덕길)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위험한 곳마다 밧줄을 매어주고 발디딜 자리를 만들어줬다. 한 곳 두 곳 길을 만들어 연결하다 바다 경관이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운 해안에 산책로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삽과 곡괭이를 갖고 만대항 선착장에서 꾸지나무골해수욕장까지 리아스식 해변을 따라 자연을 최대한 살리면서 10.2㎞의 오솔길 같은 산책로를 만들었다. 군부대의 해안순찰로, 오솔길, 임도 등과 연결된 길은 3∼4시간 정도 걸린다.
솔향기길은 이원반도 끝자락 만대항에서 시작한다. 이원반도는 가로림만을 사이에 두고 서산시 대산읍과 마주하며 북으로 길게 튀어나왔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내륙인 남쪽으로는 제대로 된 도로가 없어 주민들은 북쪽 바닷길을 이용해 대산이나 인천을 오갔다. 태안읍내 구경 못한 사람은 많아도, 인천 안 가본 사람은 없을 정도란다. 옛날 태안읍내에서 이원반도로 가려면 길이 험하고 멀어 ‘가다 가다 만데…’라고 해서 만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 곳’이라는 뜻에서 만대(萬垈)라는 얘기도 전해진다.
솔향기길은 이름 그대로 소나무 일색의 숲길이다. 들머리 대형안내판 뒤로 황토의 언덕으로 올라간다. 5분쯤 걸으면 안부에 산수골약수터가 나온다. 지금은 폐쇄됐다. 이어 솔숲길을 걷다보면 해변 백사장으로 내려선다. 작은 해수욕장은 안쪽이 모래사장이고, 바깥쪽은 자갈로 이뤄져 있다. 활 모양으로 휘어진 해수욕장 앞 바다에는 사이좋게 세 개의 바위가 어깨를 맞대고 서 있다. 삼형제바위다. 방향에 따라 두 개 또는 세 개로 보인다. 바위를 중심으로 남쪽방향인 만대항에서 보면 첫째가 아우 둘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고, 동쪽의 황금산 앞바다에서 보면 삼형제 모두가 드러나 셋으로 보인다. 삼형제바위에는 애틋한 전설이 서려 있다. 홀로 세 아들을 키우던 한 여성이 바다에 일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자 세 아들이 어머니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바위가 됐다는 것이다. 일출을 맞기에 좋다.
숲길을 따라 둔덕을 넘어서면 큰구매수동해변이 기다리고 있다. 모래와 자갈, 조개껍데기 부스러기가 백사장을 이루고 있다. 거칠게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소리가 요란하다. 바다 건너편에서는 코끼리바위 등 기암절벽을 앞세운 황금산이 우뚝 서 있고 그 너머로 대산석유화학단지가 낯선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코끝까지 와닿는 그윽한 솔향기에 취해 걷다보면 솔숲 사이로 푸른 바다가 무시로 얼굴을 내민다. 꼬불꼬불 이어진 흙길은 양탄자처럼 부드럽고 포근하다. 몽돌해변도 만나고, 기암절벽을 이룬 리아스식 해안을 지나친다. 오른쪽 허리춤에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길은 자꾸만 바다에 가까워지려고 한다. 바다 쪽으로는 절벽을 이루고 있지만, 절벽 위의 길은 걷기에 더없이 좋은 흙길과 솔숲으로 이어진다. 청량감이 가슴속 깊이 밀려든다. 도시에서 오염됐던 몸과 마음을 샤워하는 기분이다.
피톤치드를 가득 내뿜는 해송(곰솔) 사이를 시원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산책하다 보면 경관이 좋은 곳에는 전망대와 쉼터가 발길을 붙잡는다. 곳곳에 세워진 이정표는 길 잃을 염려를 붙잡아둔다. 순우리말로 된 정겹고 소박한 지명에 미소가 배어나온다. 구매수동, 헤먹쟁이, 지레너머, 별쌍금약수터, 와랑창, 어리골, 도투매기 등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지명도 여럿이다.
숲길로 접어들어 바다가 보이는 곳에 ‘붉은앙뗑이’라고 쓴 푯말이 서 있다. 앙뗑이는 ‘절벽’의 태안 사투리. 붉은 앙뗑이는 인근의 돌과 흙이 붉은 빛을 띠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어 나타나는 새막금쉼터, 당봉전망대는 만대마을을 에워싸고 절경을 빚어낸다.
가마봉전망대에 서면 남쪽에서 다가오는 여섬의 모습이 압권이다. 옛 선인들이 이름을 지을 때 나머지 섬이라 해서 ‘남을 여(餘)’자를 써서 여섬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름은 그 섬의 운명이 됐다. 1999년 여섬 인근에 이원방조제가 생기면서 방조제 안쪽에 있던 다른 섬들은 모두 육지가 되고 여섬 홀로 ‘섬’으로 남았다. 이곳은 일몰풍경이 아름다워 낙조명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커다란 불가사리를 엎어놓은 듯한 20여m 높이의 여섬은 물이 빠지면 하루에 두 번씩 200여m의 길로 육지와 연결된다. 여섬 뒤에서는 멀리 태안군 원북면의 태안화력발전소가 하얀 수증기를 뿜어내고 있다.
중막골을 지나면 용난굴이다. 입구부분 높이 3m, 아랫부분의 폭 2m 정도 되는 용난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높이도 낮아지고 폭도 좁아진다. 18m쯤 들어가면 양쪽으로 두 개의 굴로 나뉜다. 두 마리의 용이 굴 하나씩 자리를 잡고 하늘로 오르기 위해 도를 닦았는데, 우측의 용이 먼저 승천하니 좌측의 용은 승천길이 막혀버렸다. 승천한 용은 굴 입구 위에 비늘자국을 남겼지만, 갈 곳이 없는 용은 망부석이 돼 입구에서 용난굴을 지키고 있다. 용이 승천할 때 밀고 나왔다는 굴문바위가 입구에 놓여 있고 인근에 곰바위, 거북바위 등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가 정원처럼 자리잡고 있어 볼거리를 풍성하게 해준다. 바로 옆 누워 있는 소나무, 와송은 밀물 때면 잠기는 독특한 형세를 지녔다.
바닷가에 예쁘게 자리한 펜션들을 지나 1코스의 종착지 꾸지나무골해수욕장으로 들어선다. 꾸지나무골은 꾸지뽕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백사장 길이가 200m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작은 해수욕장이지만 울창한 소나무를 품고 있어 안온하다.
■여행메모
필수 먹거리 박속밀국낙지탕 별미… 만대항 주변엔 활어회 전문점 즐비
충남 태안군 북단 이원면 내리 만대항은 서울로부터 173㎞ 떨어져 있다. 자가용을 이용하면 서해안고속도로 서산나들목에서 내려 서산·태안 방면으로 길을 잡은 뒤 태안 읍내를 거쳐 603번 지방도를 타고 이원면소재지를 지나면 닿는다.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버스를 이용하면 태안시외버스터미널까지 2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터미널에서 만대항 방면 버스로 갈아타면 된다. 솔향기길은 이원반도의 아름다운 해안 38.5㎞를 따라 총 5개 코스로 나뉘어 있다. 인근에 천리포수목원, 사목 해변, 태안 서부시장, 만리포 해변 등도 볼거리다.
굴과 함께 박속밀국낙지탕은 태안 북부 여행의 별미로 손색이 없다. 통째로 넣은 낙지와 박이 어우러진 시원한 육수에 칼국수, 수제비를 곁들인 박속밀국낙지탕은 독특한 맛을 낸다. 원북·이원 일대 식당이 박속밀국낙지탕을 내놓는다.
만대항 주변에 횟집이 몰려 있다. 이 가운데 만대수산(041-675-0108)은 자연산 활어회 전문점이다. 자연산 광어회(사진)도 맛볼 수 있다.
태안=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