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유익한 삶, 유익한 죽음

입력 2016-11-15 21:11

예수님을 믿게 되면 영적으로 풍성해집니다. 그러나 이 세상 자체가 고달픈 곳이기 때문에 우리는 차라리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하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죽음을 선택한다면 궁극의 안식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한 선택일까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는 열 두 사도 중 제일 먼저 순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볼 때, 이는 매우 큰 손실이었습니다. 주님의 기대 속에서 많은 훈련을 받고 확신이 가득했던 야고보가 어찌하여 속절없이 죽을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 자신도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을 것에 대해 꺼리는 마음이 있었지만 예루살렘에 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야고보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담대한 결단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주와 복음을 위해 장렬하게 죽는 것을 가장 멋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도 감옥에 갇혔을 때 몇 시간 후에 죽을 텐데도 굳이 살려하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만 했습니다. 당시 교인들도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면 죽는 것이 영광스럽고 당연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베드로가 살아 돌아왔는데도 그의 천사일 것이라고 하며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만약 믿는 자들이 죽는 것이 최선이라면 주님께서 베드로도 죽게 내버려 두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지금 죽는다면 지옥으로 가는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고 진리를 알기 원하시는 주님은 믿는 자들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삶을 택하는 것도 기뻐하십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돌아온 후 당시 교인들은 하나님이 그를 살리신 것을 보며 자신들이 지도자의 안위에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미 야고보의 순교로 복음이 확장되는 것에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이후에는 위험한 상황에서 베드로를 보호하거나 피신시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영적 지도자들을 보호하는 기도와 실천의 책임이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은 여러분들을 위해서 말씀과 기도로, 여러분들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공생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또 하나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은 바울에 대한 것입니다. 당시 사울과 바나바가 구제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행 11:28∼30), 야고보가 죽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바울은 그의 죽음을 보며 자신도 복음을 전하다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후에 베드로가 풀려난 것을 보면서는 받은 사명이 있다면 죽을 상황에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담대함을 얻게 됐을 것입니다. 또 그들을 해하던 헤롯 왕이 비참하게 죽는 걸 보면서는 주님이 믿는 자들을 보전하신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바울이 저절로 바울 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을 통하여 삶과 죽음이 둘 다 유익하다는 사고방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살리려는 주님의 심장을 갖고 우리는 악착같이 살아야 합니다. 최고의 강자는 죽는 것이나 사는 것이 똑같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둘 중 어느 하나에 집착하기 때문에 우리가 약해지는 것인데, 살든지 죽든지 두려움 없이 주님을 존귀케 하는 높은 차원의 신앙 개념을 가지고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명진 목사 (서울 빛과진리교회)

약력=△서울 출생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평양노회 서기 △참수리신문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