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한 민심이 모여 11월 12일 ‘100만 촛불집회’를 만들었다. 이날 집회는 경찰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규모 인파가 몰렸고, 군부독재 저항 시위 이후 최대 규모였다. 시민들은 자유발언대에서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고, 문화인들의 공연도 이어졌다. 우리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집회라 할 수 있다. 이렇게까지 국민을 집중시킨 힘, 그 에너지는 무얼까 싶다.
인간은 여러 감정을 지니고 있다. 이런 감정은 인간의 의사결정과 행동에 영향을 준다. 또한 감정은 서로 다른 개인에게 그들의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전달된다. 개인을 넘어 집단의 감정 상태는 정보를 소통하고 집단 유대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집단 활동을 통합하는 데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서적 전염성은 정보가 빠르게 전달되는 것을 용이하게 하기 때문에 집단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핵심 요인이다. 감정의 전염성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비슷한 정서적 상태를 경험하도록 한다. 이로 인해 사회적 상호작용을 촉진하고 집단적인 행동을 하게 할 수 있다.
부정적이고 위협과 연관된 정서는 긍정적인 정서보다 정서적 전염성의 효과가 두드러진다. 기쁨 같은 감정은 왜 기쁜지를 생각하는 인지적 처리를 요구한다. 그러나 분노는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의 분노를 목격하는 순간 같이 분노하게 된다. 한 사람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그 집단의 다른 사람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리는 시그널이 되기 때문이다. 분노는 그 집단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동질감을 가진 구성원들 사이에서 일단 분노가 일어나면 자동적으로 집단 전체로 전염되기 쉽다.
한 연구에서 6개월에 걸쳐 10만명을 대상으로 인간이 지닌 기쁨, 분노, 혐오, 슬픔의 4가지 감정 중에 어떤 것이 SNS에서 전파 효과가 가장 큰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긍정적인 감정보다 부정적인 감정이 더 많이 전달되고 댓글도 많았다.
부정적 감정 중에서도 특히나 분노의 파급효과가 가장 컸다. 이렇게 인간이 가진 여러 감정 중에서 가장 전염성이 큰 것이 바로 분노이다. 그런데 감정이 표현되고 사람 사이 의사소통하는 데는 강도가 있다. 이런 강도는 정서적 에너지와 관련된다.
더 큰 정서적 에너지는 더 큰 파급력으로 연결될 수 있다. 정서적 에너지가 큰 감정일수록 사람들은 그쪽으로 시선과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격렬한 분노와 같은 높은 에너지 표현은 우울함과 같은 낮은 에너지 표현보다 더 강한 전염성이 있다. 더 큰 정서적 에너지는 그 메시지를 더 명확히 전달하게 된다.
이번 사건으로 인한 절망과 무기력감을 지칭하는 ‘순실증’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모욕감을 토로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우울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절망과 무기력의 기저에는 강렬한 에너지를 지닌 감정, 분노가 있다. 억울함과 배신감으로 인해 치가 떨리는 분노이다.
가장 전염성이 큰 분노가 대한민국을 뒤덮었다. 감동스러운 것은 그 분노의 표출방식이다. 국민들은 손쉬운 분노의 표출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폭력이나 공격이 아니라 침착하고 평화로운 시위로 의견을 개진했다. 성숙하고 승화된 국민성의 지표가 아닐 수 없다.
개탄스러운 것은 집권층의 절망적인 성숙도다. 비밀과 은폐가 결코 적절한 대책이 아님은 분명하다. 더 많은 소문과 추측만을 낳을 뿐이다. 대통령과 청와대, 정치권, 검찰은 부디 성숙한 국민에 걸맞은 처신을 하기를 바란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청사초롱-곽금주] 분노와 성숙
입력 2016-11-15 1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