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0월 중순부터 12월까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직 대통령 3명의 집 앞에서 기자들 용어로 속칭 ‘뻗치기’를 했다. 당시 박계동 민주당 의원의 국회 대정부 질의로 불거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시작된 연희동 사저 앞 취재가 길 건너 전두환 전 대통령 집 앞을 거쳐 최규하 전 대통령의 서교동 집 앞 취재로까지 이어졌다.
하루는 노 전 대통령이 ‘칩거’ 중인 사저에 꽃동네 신부가 위로차 찾아왔다. 노 전 대통령이 꽃동네 후원회에 가입돼 있는 것이 인연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평소 꽃동네에 기여한 바가 있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돌아온 것은 “1년에 회비 1000원을 냈다”는 신부의 답변이 전부였다. 취재진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재임 시 4000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한 최고 권력자의 씀씀이치고는 너무 손이 작았기 때문이다. 사저를 지키는 경찰청 소속 경비대원들을 취재해 보니 회식비 한 푼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수천억원대 비자금 조성이라는 대통령의 권력형 비리와 그에 따른 검찰 수사는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당시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앞 ‘포토라인’에 선 두 전직 대통령의 표정은 회환과 한숨으로 가득 차 보였다. 비록 군부를 등에 업고 통치했던 대통령들의 권위에 가위눌렸던 국민일지라도 그들 눈에 검찰청 앞 ‘포토라인’에 대통령들이 서 있는 모습은 나라망신 내지는 수치(羞恥)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로부터 꼭 21년이 흐른 지금 강산은 벌써 두 번이나 변하고도 남았는데 우리 대통령의 행태는 ‘재벌 삥뜯기’ 등 어느 것 하나 개선된 게 없다. 오히려 더욱 악화됐다. “이게 나라냐”는 촛불집회 구호는 최고 유행어가 됐다. 막장드라마나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을 뛰어넘는 의혹들은 이미 나라 전체를 호기심의 경계를 넘어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대통령 조사와 관련해 예우를 따지고 있다. 대통령이 현직인 만큼 전례가 없다며 검찰 소환, 즉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 포토라인에 세우기를 꺼리며 그보다 약한 방문조사 방식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 방문조사 때 영상 녹화조차 생략할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저지른 것 말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않는다고 헌법에 써 있다. 이는 재직 중 처벌을 면한다는 것이지 수사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대통령에 대한 특권은 특수한 ‘직책’을 수행하기 위함이지 특수한 ‘신분’을 보장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언젠가 헌법재판소는 결정한 적이 있다.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이 3·15부정 선거로 하야(下野)한 이후 현직 대통령이 나라를 이만큼 뒤집어놓은 사건이 있었는가. 내란이나 폭동은 아니라도 대통령이 할 일을 사인(私人)에 맡겨 놓았다는 의혹은 헌법상 대통령이기를 부정하는 행동 아닌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지붕을 기와로 바꾼 덕을 본 실버세대들조차 이젠 딸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을 후회하며 촛불을 들고 광화문광장으로 몰려들고 있을 정도다. 그가 다닌 고교와 대학의 후배들은 물론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선배님, 이제 내려오시죠”라며 수치스러움을 토로하고 있다.
국민들은 이제 대통령의 변명으로 가득 찬 청와대 춘추관 ‘대국민 담화’를 들을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렸다. 대통령 주변의 권력형 비리를 뿌리 뽑기 위해서라도, 대통령의 특권 아닌 특권을 내려놓기 위해서라도, 미래세대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통령은 ‘포토라인’에 서야 한다. 그것이 실추된 국격(國格)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이동훈 사회부장 dhlee@kmib.co.kr
[돋을새김-이동훈] 대통령과 포토라인
입력 2016-11-14 1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