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朴 퇴진’때까지 촛불 켠다

입력 2016-11-13 18:25 수정 2016-11-13 21:30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100만 촛불집회 행렬이 12일 밤 서울 율곡로를 따라 청와대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한 시민들의 함성은 청와대까지 울렸지만 청와대와 박 대통령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광화문 앞 청와대로 통하는 길은 경찰의 차벽에 가로막혔다. 사진은 촛불 흐름과 청와대 전경을 다중촬영해 합성했다. 서영희 기자
배병우 부국장
12일 저녁, 서울 광화문 사거리까지 도착하기는 힘들었다. 지하철 시청역 출구에서 서울신문사 앞을 거쳐 40분 이상 시도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종로길로 향해야 했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남대문에서 광화문, 종로3가에서 광화문 사거리까지 거대한 촛불의 바다가 펼쳐졌다. 왕복 10차로 차도는 물론 인도까지 남녀노소가 앉거나 서서 외치고 노래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하야하라.” 100만명(경찰 추산 26만명). 단일 시위로는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때보다 많은 사상 최대다.

하지만 숫자 100만이 다 말해주지 않은 사실이 있다. 운집한 시민들 염원의 강도(强度). 많은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무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질서 정연하게 앉아 있었다. 스피커 소리에만 귀 기울이며 구호를 제창하고 박수를 쳤다. 자비를 들여 기차, 비행기까지 타고 광화문에 합류했다. 불편하긴 하지만 이 자리를 뜨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 아닌가 염려하는 분위기가 엿보였다. 시민들은 대통령을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놀아난 피해자로 보지 않았다. 대통령은 무능할 뿐 아니라 권력욕을 위해 민주정의 기본마저 파괴하려 한 악의적인 통치자로 여겼다. 대통령의 사과 담화문 구절 곳곳이 희화화돼 나뒹굴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 교복 입은 10대, 40·50대 장년, 백발 성성한 노부부들이 보였다. 노동조합, 고교·대학 학생회, 농민회, 산악회, 교회 등 조직도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모두 하나였다.

8살 난 딸과 함께 집회에 나온 주부 이유진씨는 “잘못된 지도자를 뽑으면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행동해야 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딸에게 교육시키려고 나왔다”고 했다. 박 대통령의 출신 고교인 성심여고 학생들이 첫 연사로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학교 교훈인 ‘진실 정의 사랑’을 언급한 뒤 “저희의 목소리가 들리신다면 제발 그 자리에서 내려오십시오. 우리는 당신을 대한민국의 대표로 삼으며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경기도 수원에서 온 이모(47)씨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나왔다. ‘이게 나라냐’. 이 한 문장이 나를 거리에 나오게 했다”고 했다. 100만명이 모였지만 경찰과의 충돌이나 불미스러운 폭력사태는 없었다. 시민들은 쓰레기를 주웠다. 믿기 어려울 만큼 평화로운 집회였다. 평화 집회를 박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약한 징표로 본다면 이는 큰 오산일 것이다. 흥분한 일부 시민이 경찰을 향해 거칠게 달려들면 시민들이 오히려 말렸다. 박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시민들의 의지의 표출로 보였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끝장낸 6월항쟁 때처럼 민심이 현 정권을 떠났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주요 외신들은 이날 시위 규모가 엄청났음에도 평화롭게 진행된 것에 놀라움을 나타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카니발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며 “과거 같은 폭력은 없었다”고 전했다. CNN방송은 “대통령 사임을 요구하는 심각한 상황인데도 시위대는 라이브 음악 공연을 즐기는 등 유쾌해 보였다”고 보도했다.

사상 최대의 반대 집회에도 박 대통령이 하야를 결단할 가능성은 아직은 낮아 보인다.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13일 브리핑에서 “대통령은 현 상황의 엄중함을 깊이 인식하고 있고, 대통령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국정을 정상화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이 정국 수습을 위해 2선 후퇴, 탈당 여부 등 야권의 요구를 신중하게 검토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다만 청와대는 대통령 하야는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새누리당 비주류들이 개최한 비상시국회의에서는 박 대통령 탄핵과 하야 요구가 터져나왔다. 김무성 전 대표는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헌법 위배의 몸통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에 모든 판단과 원칙은 헌법이 기준이 돼야 한다”면서 “대통령은 국민의 이름으로 탄핵의 길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종로1가 근처에서 가족과 함께 있던 한 가장에게 말했다. “대통령이 하야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고. 잠시 생각하던 그는 “그러면 다음 주, 그 다음 주는 물론 대통령이 물러날 때까지 계속 촛불집회 해야죠. 하지만 오래 버틸 수 있을까요. 민심이 이런데…”라고 했다.

배병우 부국장 bwbae@kmib.co.kr, 사진=서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