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촛불’ 세대·신분 뛰어넘었다

입력 2016-11-14 00:03
분노로 타오른 100만개의 촛불이 단풍 든 늦가을 가로수보다 붉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민중 총궐기가 열린 12일 오후 서울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를 가득 메운 촛불이 광화문 앞까지 뻗어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2일 서울에서만 100만명(경찰 추산 26만명)이 모여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기록적인 인파가 광장으로 쏟아진 데는 각계각층의 분노와 실망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정유라(20)씨의 이화여대 특혜 입학 의혹에 상처받은 청년층과 아이들에게 이런 나라를 물려줄 수 없다는 젊은 부모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2030세대는 보답받지 못한 노력에 대해 분노를 터트렸다. 이화여대에 다닌다는 한 학생은 이날 서울 광화문광장 자유발언대에 올라 “정유라씨가 아는 이모의 ‘빽’으로 말 타고 학교 들어왔을 때 말 살 돈 없는 우리는 밤새 리포트 써서 내도 ‘씨쁠(C+)’ 받지 않았습니까”라며 울분을 토해냈다.

지난주에는 라이브 영상으로 집회를 시청했다는 직장인 최모(29·여)씨도 “많은 사람이 모여야지만 박근혜정권이 반응할 것 같아 나왔다”며 “정유라씨 단 한 명 때문에 교육, 스포츠 등 여러 시스템이 부패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부모님, 동생과 함께 집회에 나온 취업준비생 임모(24·여)씨는 “나를 포함해 주변에 취업준비생들이 열심히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와중에 이런 사태를 접하니 허탈감이 너무나 컸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른이 만든 세상에 불신을 표하는 청소년도 많았다. 수능을 닷새 앞둔 고교 3학년 박종태(18)군은 청계광장에서 “수능이 뭔 대순가 싶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보다 좋은 나라에 사는 게 우선이라 생각해 나왔다”고 외쳤다. 경기도 고양에서 한 시간 넘게 지하철을 타고 온 고교 2학년 신모(17)양도 “지난주 집회에 와보니 친구들도 같이 와야 할 것 같아 오늘은 3명을 더 데리고 왔다”며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들이 현실과 너무 다른데 고등학생들도 일어나야 뭔가 변화가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부모들은 “내 아이를 이런 나라에서 키울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7살짜리 아들 손을 잡고 온 주부 이모(37)씨는 “국민의 뜻이 한 곳에 모이는 자리라 아이에게도 국민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며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나라가 되지 말았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회사원 김모(46)씨 부부도 초등학교 4학년 아들과 함께 집회에 참여했다. 김씨의 아내 전모(41)씨는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나왔다”며 “아이도 이제 4학년이니 이런 분위기를 배우면서 국민들이 가만히 앉아있지 않고 대응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국정농단’에 문화융성 정책이 이용됐다는 사실에 분노한 연예인들도 집회에 힘을 보탰다. 과거 같으면 방송출연 정지를 각오해야 했지만 이들은 이런 우려를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축제에 흥을 돋웠다.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화제에는 방송인 김제동 김미화, 가수 이승환 크라잉넛 등이 참여해 시민들을 즐겁게 했다. 이승환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못해 마냥 창피하다”며 “더욱 분발하겠다”고 말해 환호를 받았다. 이씨는 히트곡 ‘덩크슛’을 부르면서 ‘야발라바히기야’라는 노랫말을 ‘하야하라 박근혜’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실버세대의 힘도 컸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한 노신사는 외투에 ‘하야하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국민의 마음은 다 똑같지 않겠느냐”며 미소를 지었다. 이날 촛불집회 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는 부산 출신 60대 여성이 “새누리당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나이를 먹어보니 이게 아니란 것을 알았다”며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고백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번 집회를 위해 전남 여수에서 올라온 전직 초등학교 교사 장형석(65)씨는 “지난번 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는 사과가 아닌 발뺌이었다”며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어 국민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여기에 나왔다”고 밝혔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