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여기 나와 이런 얘기를 하려고 초등학교에서 말하기를 배웠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서 잠이 안 옵니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김제동과 청년이 함께 만드는 광장 콘서트’에서 초등학교 5학년인 금다교양이 마이크를 잡았다. 박근혜 대통령 성대모사를 하며 대통령의 2차 대국민 담화 당시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이 든다’는 표현을 인용하자 박수가 쏟아졌다. 금양은 노란색 패딩점퍼 차림에 모자를 둘러쓰고 휴대전화에 써놓은 글을 읽어내려갔다. 금양은 “이 시간에 메이플스토리(넥슨의 온라인 게임)하면 레벨 업이 되는데 시간이 너무 아깝다”며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 한 게 자괴감이 들고 괴로우면 그만두세요”라고 돌직구를 날렸다.
이날 집회 현장에는 세태 풍자가 넘쳐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 ‘자괴감 시리즈’도 계속됐다. 인디밴드 크라잉넛은 “요즘 저희가 이러려고 크라잉넛을 했는지 자괴감이 든다”며 “우리는 말을 독일로 달리러 가는 게 아니다. 이화여대로 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달려야 할 곳은 청와대”라고 외쳤다. 광화문광장을 메운 시민들은 크라잉넛의 히트곡 ‘말 달리자’를 함께 불렀다.
조형물을 이용한 패러디는 웃음을 자아냈다. 한 용달차량은 광화문광장 한가운데에 사람 손아귀에 잡힌 닭 모형을 싣고 서 있었다. 목이 비틀린 채 혓바닥을 늘어뜨린 닭의 등에는 ‘내가 이러려고…’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닭이 처한 상황에 자괴감 패러디를 인용하는 동시에 박 대통령을 동물로 희화화했다.
10대 청소년들은 재치 있는 플래카드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각하, 말 타고 하야하시죠’ ‘선생님 이럴 때 화내라고 공부했던 거죠?’ ‘이 나라가 제정일치 사회냐, 순실 강점기냐?’ 등의 따끔한 일침이 이어졌다. 한 학생은 ‘엄마, 나도 말 사줘!’라고 쓴 스케치북을 들었고 어른들은 ‘엄마가 말은 못 사주지만 좋은 나라 만들어줄게!’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현 세태에 들어맞는 가사의 아이돌 노래도 등장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가사에 의미가 있다”며 아이돌 그룹 레드벨벳의 ‘덤덤’을 틀었다. 스피커에서 “마네킹 인형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어색하지. 평소같이 하면 되는데 또 너만 보면 시작되는 바보 같은 춤”이라는 가사가 나오자 이 노래를 모르는 참가자도 웃음을 터뜨렸다. 2000년대 인기곡이었던 가수 김현정의 ‘멍’이 흘러나오자 시민들은 큰 소리로 “다 돌려놔”라며 가사를 따라 불렀다.
늦은 밤까지 광화문 곳곳에서 음악이 어우러진 난장이 펼쳐졌다. 시위에 참여한 직장인 전모(27)씨는 “서민들이 모여 권력의 도덕성을 질타하면서 멍든 가슴을 치유하는 자리”라고 평했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
초등생 “내가 이런 얘기하려고 말하기를 배웠나…”
입력 2016-11-14 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