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명의 따뜻한 ‘하루’를 담았어요

입력 2016-11-13 21:17
최성문씨가 최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자신이 만든 달력 ‘2017년 하루를 쓰다’를 소개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31일이 공백(빨간원)으로 남아있는 2017년 달력의 10월 부분. 김보연 인턴기자

최성문씨를 처음 만난 건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던 2년 전 어느 날 서울 성북구 한 카페에서였다. 당시 그는 가방에서 독특한 달력 하나를 꺼냈다. 우리사회 각계각층 인사 364명이 각각 쓴 ‘날짜’를 모아 완성한 달력의 이름은 ‘하루를 쓰다’. 365개의 날짜 중 ‘10월 31일’의 ‘31’은 달력 구매자가 기입토록 돼 있는 이색 달력이었다. 왜 이런 달력을 만들었는지 묻자 최씨가 답했다.

“주기도문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대목이 있는데, ‘나’가 아닌 ‘우리’라고 표현돼 있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우리’를 위한 무언가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고민 끝에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드는 공동예술 프로젝트 ‘하루를 쓰다’를 기획하게 된 거죠.”

최씨로부터 다시 연락이 온 건 지난달 중순이었다. “‘2017년 하루를 쓰다’ 달력을 완성했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였다. 연락이 끊긴 2년간 그는 또 달력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최씨는 무슨 이유에서 이 프로젝트를 재개한 걸까. 최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2015년도 달력을 준비하던 2014년 2월이었어요. 경기도 안산에 갔는데 외국인노동자가 정말 많더군요. 그들을 만나면서 언젠가 이들이 중심이 되는 달력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죠.”

‘2017년 하루를 쓰다’는 2년 전 달력과 같은 얼개를 띠고 있다. 각기 다른 필체의 ‘날짜’가 모여 달력이 완성됐는데 내용은 다르다. 국내외 외국인들이 쓴 글씨가 상당히 많다.

최씨는 국내 다문화가정 아이들로부터도 ‘날짜’를 받았다. 터키 네팔 일본 중국 몽골 등지도 방문해 현지인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달력 제작에 동참한 이들의 국적은 18개국. 상징적 의미를 갖는 ‘1월 1일’ 날짜도 외국인이 적었다. 주인공은 캄보디아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한 여성이었다.

최씨는 “외국인을 상대로 이 프로젝트의 취지와 의미를 설명하는 게 쉽지 않았다”며 “하지만 달력을 만드는 이유를 설명하고 난 뒤 동참하는 걸 거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이 이미 ‘유목민 사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민처럼 떠도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 하지만 달력을 만들면서 이런 세상에도 따뜻한 사랑이 존재하고 우리 곁에는 이웃이 있다는 걸 알겠더군요. 달력을 구매하는 분들도 같은 느낌을 받았으면 합니다.”

날짜를 적은 사람 중에는 우리사회의 내로라하는 명사도 적지 않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배우 강석우, 록밴드 장미여관 등이 달력 제작에 동참했다. 달력 표지를 장식한 ‘2017년 하루를 쓰다’라는 문구는 고(故) 신영복 교수의 글씨다. 신 교수는 ‘2015년 하루를 쓰다’ 문구를 직접 썼다.

최씨는 “올여름 선생님의 지인을 통해서 생전에 선생님이 써놨던 숫자 ‘7’을 받아 기존 글씨체에 끼워 넣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2년 전 2015년 달력을 완성해 선생님을 만나러 갔을 때 달력을 그냥 받을 수 없다면 10만원을 주시던 모습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달력은 일력, 탁상용 월력, 다이어리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수익금 전액은 외국인노동자 난민 여성 노숙인 등 우리사회 소외된 이웃들을 돕는 데 사용할 예정이다. 달력 제작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크라우드펀딩(대중모금) 사이트인 와디즈(wadiz.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울 나들목교회(김형국 목사)에 출석하는 최씨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동등하다”며 “우리사회의 명망가든 약자든 날짜 1개만 쓰도록 한 것도 이런 메시지를 담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2018년, 혹은 2019년에도 달력을 만들 계획인지 물었을 때는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아무런 계획이 없어요. 지금은 2017년도 달력만 생각하고 있답니다.”

글=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사진=김보연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