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앞에 백만명이 모여 한목소리로 ‘대통령 하야’를 외치던 시간. 집회상황을 생중계로 지켜보며 나는 김장을 했다. 요즘도 집에서 김장을 하냐고 묻는 친구들도 많지만. 나는 결혼 15년 동안 한 해도 김장을 거른 적이 없다. 물론 나 혼자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주도해서 한 것도 아니다. 시댁에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일’이란 개인의 계획과 감정은 잠시 접고 함께해야 하는 목표를 위해 가야 하는 것이라면서도, 가정이라는 소규모 공동체의 일 때문에 ‘대통령 하야’를 위한 대규모 공동체의 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이토록 아쉬운 적이 없었다.
친정 부모님은 교외에, 텃밭이라기엔 꽤 큰 밭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땅을 놓은 적이 없다. 도시에 살게 되더라도 가까운 곳에 밭을 구해 그곳에 씨를 뿌리고 거두셨다. 생업이 농사는 아니고 매해 먹을 김장거리와 여름 내내 먹을 푸성귀들을 뿌리고 거두는 일이다. 생업이 불안정하던 내 어린 시절엔 밭에서 거둔 것들을 시장에 팔기도 하셨지만, 지금 농사의 소출은 거의 출가한 사남매의 가정과 사돈댁에 드리고 있다. 어떤 때는 내가 다 먹지 못할 만큼도 주신다. 그러면 그것을 버리지 않고 나눠먹을 방도를 짜느라 내 생활은 절대 고독할 수가 없다. 나에겐 필요치 않아도 이 식재료들이 필요할 이웃과 친구들에게 연락하느라. 하지만 요새는 마트에 가면 1∼2인용으로 깔끔히 담겨진, 반조리 상태인 식재료들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그러니 흙을 털고 하나하나 다듬어야 할 채소는 줘도 안 반가운 것들이 되었다.
칠순의 어머님은 올해도 어김없이 김장철이 되자 배추 뽑아가라고 했다. 배추 값은 작년에 비하면 세 배나 비싸다. 이런 시기에 손수 지은 배추를 주신다니 마다할 수 없었다. 절인 배추를 쌓아놓으면서, 파를 다듬으면서, 김장 소를 버무리면서 시민들의 ‘대통령 하야’ 요구가 드높던 시위현장 생중계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는데, 아마도 파 때문인 것 같다. 어쨌거나 눈물이 섞인 올해 김장 소는 간이 딱 맞았다.
글=유형진 (시인), 삽화=전진이 기자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들판으로 내려간다는 말, 下野
입력 2016-11-13 1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