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조준 <11> 교회 옛모습 유지하면서 예배당 2배로 증개축

입력 2016-11-13 20:56 수정 2016-11-13 20:57
1977년 6월 증개축된 영락교회 전경. 십자형으로 증축된 약 3200㎡(970평) 규모의 본당에는 예배실과 시무장로실, 기도실, 방송·녹음실 등이 들어섰다. 영락교회 제공

“목사님, 지금 있는 교회시설로는 교인 전부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교회건물은 그 역사를 기려서 기념예배당으로 남겨두고 방배동에 땅을 사서 1만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새로 지으면 어떨지요.”

예배당 신축 문제로 한경직 원로목사님을 찾아가 이렇게 여쭸다. 원로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박 목사, 옛날에도 초가집 헐고 기와집 지을 때도 말이 많았어요. 증개축을 하지 않으면 다른 길이 없을 텐데, 이런 저런 말 들을 것 없이 교회가 정한 대로 시행하세요.” 이렇게 말씀해주신 원로목사님은 친히 제직회에 들르셔서 간곡한 어조로 제직회원들에게 설득까지 하셨다.

증개축하는 예배당은 앞부분과 종탑은 손대지 않아 옛날 예배당 모습을 그대로 살렸다. 외형도 기존 건물과 같은 석조로, 창문도 당시 형태 그대로 유지했다. 다만 아쉬운 부분 중 하나는 본당 내부 구조에 있어서 좌석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외형을 그대로 남겨둔 채 날개를 달아 좌석을 두 배로 늘리려 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교회가 전적으로 이해하고 협조해 준 덕분에 증개축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더 넓어진 예배당에서 주일 예배를 다섯 번 드렸는데도 신자들이 또 차고 넘쳤다. ‘아니, 이 많은 식구들이 예배당 공사 기간에는 어디서 예배를 드렸을까’ 갸우뚱할 정도로 놀랐다.

예배당을 증개축하는 과정에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분이 있다. 건축위원장을 맡으셨던 김치복 장로님이다. 김 장로님은 월남하실 때 한경직 목사님을 모시고 내려오셨다. 한 목사님을 아버지처럼 섬기는 분이셨다. 나이로 따지자면 나는 그 분의 아들 뻘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장로님은 원로목사님이 나를 세웠다고 하시면서 물심양면 도와주셨는데 송구할 정도였다.

교회 증개축 당시 큰 회사 대표인데다 직장암으로 투병하시던 김 장로님은 공사가 끝날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직접 감독하셨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수고하는 일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저 묵묵히 봉사하신 그 분을 생각하면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교회 일을 하다보면 수고는 수고대로 하고 말은 말대로 듣게 되는 일이 많다. 일하는 사람은 말없이 일만 하고 말하는 사람은 일은 안하고 말만 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김 장로님은 진정한 섬김이 무엇인지 몸소 실천해주신 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요기도회 때 성경 강해를 했다. 매번 1만명 이상의 회중이 모여들었다. 참석자들의 열의는 대단했다. 기도회 시간에 맞춰 오려고 저녁을 건너뛴 채 발걸음을 재촉하는 젊은이들과 신학생들도 많았다. 심지어 명동성당에서 시무하는 수녀들도 10여 명씩 참석했다. 군사독재 정권으로 암울했던 1970년대 당시 답답하고 울분에 차 있던 많은 젊은이들이 성경말씀을 통해 위로를 얻고 해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군사 정권에서 언론을 통제하니 바른 말 바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 교회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간판을 내걸고 정권이 독재 정치를 합리화하면서 많은 이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 누구에게도 속 시원하게 속마음을 꺼내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때 성직자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좌시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