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중에 차선변경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앞차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가지 못할 때 그렇습니다. 그래서 더 빨리 가려고 차선을 변경했는데 앞에 또 천천히 주행하는 차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네의 인생입니다. 문제를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고생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고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투덜거립니다.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겐 개인적인 고난이나 보편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과 상관없습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우리를 어렵게 합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인간의 운명입니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창 3:16)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고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 5장 7절에선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크리스티앙 보뱅은 “오늘 누구를 만나든, 그는 벌써 여러 차례 지옥을 경험한 사람임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부친상을 치르고 난 어느 분이 “아버지가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더군요. 이렇게 죽음이란 발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산다는 것은 어려움을 짊어지고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현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어려움이나 고난에 대해 믿음으로 선(先) 감사해야 합니다. 즉 먼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미리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해결되고 나서 감사하는 게 아니라 어려움 앞에서 먼저 감사로 반응하자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는 선 감사, 후 축복이었습니다. 그는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멸망시키는 하나님 섭리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현실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수용하면서 감사했습니다.
그는 17∼18절에서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을지라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반응이나 태도는 달리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현실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감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난은 남아있어도 고통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나중에 고난도 극복하게 됩니다.
미국 댈러스신학교 척 스윈돌 명예총장은 “세상의 모든 일은 일어난 일 10%와 그 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90%로 결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결단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자연에만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에도 관성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감사합니다. 감사가 증가합니다. 감사할 일들이 자꾸자꾸 생깁니다. 감사가 감사를 만드는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고난의 현실을 부정하거나 원망하지 마시고 먼저 감사해야 축복이 옵니다.
유봉호 목사 (부산 연산성서침례교회)
◇약력=△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 숭실대학교 대학원(Th.M) 졸업 △현 한국성서침례회 총무,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 운영이사, 부산 극동방송 및 C채널 방송 설교자
[오늘의 설교] 선 감사, 후 축복
입력 2016-11-11 2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