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민 파헤치면 신상에 좋지 않을 것 中情서 압력”

입력 2016-11-11 21:01 수정 2017-01-17 13:42
고 탁명환 소장은 1973년 5월 사이비 영세교 교주 최태민(위)과 대전에서 첫 대면한 이후 최태민 일가를 추적해왔다. 오른쪽 사진은 최태민이 교계 신문에 낸 대한구국선교단 광고.
탁명환 소장이 최태민을 조사한 내용을 담은 ‘현대종교’ 1988년 5월호 관련 기사.
탁명환 소장
탁명환 소장의 세 아들로 이들은 부친의 사명을 이어받아 학계와 교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왼쪽부터 차남 탁지원 현대종교 대표, 장남 탁지일 부산장신대 교수, 삼남 탁지웅 일본성공회 신부.
1973년 5월. 신문을 보던 그에게 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영세계에서 알리는 말씀’이란 제목이었다. 문안을 보니 불교와 기독교, 천도교 사상을 혼합한 교리를 전파한다는 내용이었다. 난치병 환자도 오라는 문구도 보였다. 요상했다. 점을 치고 관상을 보던 무속인 광고와 흡사했다. 당시 그는 충남 계룡산 주변 신흥종교 연구를 위해 그 일대를 샅샅이 뒤지던 차였다. 그의 ‘촉’이 움직였다. 광고에 표시된 보문산 골짜기 감나무집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이윽고 머리가 시원스럽게 벗겨진 문제의 칙사, 원자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1세대 신흥종교 및 사이비이단 연구가인 고(故) 탁명환(1937∼1994)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소장이 사이비 교주 최태민과 대면한 첫 장면이다. 탁 소장은 이후 최태민의 정체와 대한구국십자군의 발족과 폐해, 교회를 이용한 정황 등을 담은 글을 ‘현대종교’ 1988년 4∼6월호에 소상히 담았다. 시리즈 글의 제목은 ‘부끄러운 권력의 시녀 목사들’이었다. 탁 소장은 글 말미에 “최태민의 구국선교단 사건은 확실히 암흑기의 권력형 부조리와 야합한 우리 시대의 단막극”이라며 “언젠가는 이 사건이 실제로 기독교 역사에 실명으로 기록될 때가 올 것”이라고 썼다.



우리 시대 선지자, 탁명환

그로부터 28년. ‘선지자’ 탁명환의 예언은 적중했다. 사건은 기독교 역사뿐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에 생생히 기록 중이다. 탁 소장이 썼던 시리즈물에는 최순실을 언급한 부분도 있다. “어린이회관 월간 ‘어깨동무’에도 최씨와 최씨 딸의 입김이 작용한다고 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바 있으나 수사가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 신문사 기자로 일하던 그가 신흥종교운동 연구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56년, 20세 때부터다. 신흥종교단체 영주교(靈主敎)를 목격하면서다. 이후 64년부터 본격적인 신흥종교운동 연구에 나선다. 67년부터 84년까지는 계룡산 신도안 일대를 다니며 신흥종교를 연구했다. 당시 신도안 주변을 하도 집요하게 취재하고 다니자 주변 사람들은 그를 ‘계룡산 출입기자’로 불렀다.

탁 소장은 신흥종교를 순수한 민족종교와 반사회적 사이비종교 집단으로 분류했다. 그는 특히 기독교의 전통적 가르침에서 벗어난 기독교 이단들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통일교 천부교 동방교 여호와의증인 대한기독교장막성전 등 70년대에 연구한 단체만 해도 27개나 됐다.

이러다보니 신변 위협도 많이 받았고 실제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이단 강연회를 여는 곳이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해당 신도들이 몰려와 난동을 부렸고 몰매를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탁 소장은 긴박한 상황이 아닌 한 좀처럼 경찰에 경비를 요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69년엔 ‘동방교’에서 살해 계획을 세우기도 했고 유신 치하에서는 이단들의 모함으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일례로 최태민 내막을 발표하려고 하자 당시 중앙정보부 관계자가 찾아와 이런 말을 던졌다. “그 사건을 파헤치면 신상에 좋지 않을 거다. 영애가 관련된 일이니 입 다물고 있어라.”

아들아, 너는 목사와 박사가 돼라

모함도 받았다. 83년이었다. 탁 소장이 신학교에서 가르친 제자가 그를 비판한 책을 냈다. 탁 소장은 이에 대해 “나에게 죄가 있다면 이단인 통일교와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쓰러지고 무릎 꿇고 상처받은 죄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 때문이었을까. 탁 소장은 생전에 장남인 탁지일 부산장신대 교수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너는 목사와 박사가 돼라. 나는 목사가 아니어서 이단들의 공격을 받았어도 한국교회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박사가 아니기에 신흥종교를 연구해도 학계로부터 외면당했다.” 탁 교수는 “이 조언은 선친의 마지막 유언이 됐고 유학생활과 신학 수업을 견디게 해준 힘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고난은 멈추지 않았다. 85년엔 집 앞에 세워둔 승용차에 폭탄이 터져 온 몸에 화상을 입고 실명 위기를 맞기도 했다. 92년엔 시한부 종말론파인 다미선교회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나줘주고 귀가하다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결국 그는 94년 2월 19일 새벽 0시20분, 집 앞에서 구 대성교회 운전사 임홍천의 흉기에 찔려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탁 소장은 평생 고군분투했다. 신흥종교 연구 30년 동안 어떤 교단이나 교회도 그를 적극적으로 돕거나 함께 활동한 곳이 없었다. 만약 탁 소장이 교단의 후원과 보호를 받았다면 안타까운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대위) 위원장 유영권 목사는 “각 교단 이대위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90년대 후반”이라며 “그 이전까지는 탁 소장 혼자 이단들과 맞서야 했다. 교단 이대위는 그에게 큰 빚을 졌다”고 말했다.

끝나지 않은 예언

탁 소장의 활동은 크게 세 분야로 구분된다. 첫째는 순수한 신흥종교운동에 대한 관심과 연구다. 둘째는 동방교를 비롯해 ‘용화교’ ‘섹스교’ ‘오대양사건’ ‘영생교승리제단’ 등 혹세무민의 반사회적 신흥종교운동에 대한 연구다. 타락한 범죄행위를 고발하고 대책을 세우는 일에 몰두했다. 셋째는 기독교 관련 신흥종교들에 대한 이단성을 밝혔다. 82년 ‘현대종교’를 발행해 본격화했다.

탁 소장의 삼남 탁지웅 일본성공회 도쿄교구 신부는 “아버지는 한번 일을 시작하면 멈추는 법 없이 저돌적으로 기도하셨고 바로 행동으로 이으셨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없다고 말씀하신 아버지의 예언자적 모습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차남 탁지원 현대종교 대표는 “이단 세력은 능란한 전략, 전술과 위장된 섬김과 나눔으로 과거보다 더 강한 미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며 “한국교회는 늘 말씀과 교회 중심 신앙으로 무장해 대처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예언자 탁명환의 사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시리즈물은 최태민 일가와 관련해 이렇게 글을 맺고 있다. “국회에서 국정조사권을 발동해서라도 국민의 의혹을 풀도록 해야 할 것이며 불로소득의 재산은 사회사업 기관이나 국가에 귀속시켜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권력의 장단에 놀아난 성직자들은 하나님과 한국교회 앞에 회개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이러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좋은 교훈으로 삼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 고 탁명환 소장 장남 탁지일 부산장신대 교수

“최순실은 부친 최태민 역할 계승한 후계자

부와 권력 누린 사이비 교주 재벌 2세”


고(故) 탁명환 소장의 장남 탁지일 부산장신대 교수는“최순실은 부친 최태민의 역할을 계승한 후계자로, 부와 권력을 누린 사이비 교주 재벌 2세”라고 주장했다.

탁 교수는 10일 ‘최순실은 최태민의 종교적 후계자인가’라는 제목으로 국민일보에 보내 온 글에서 “한국 이단사이비운동 역사에서 일반적 후계 승계 패턴을 감안할 때 (최순실은) 다소 예외적”이라며 “그러나 최태민의 역할이 최순실에게 이어지고 있다면 최순실은 부친의 후계자”라고 말했다.

그는 “위로 오빠가 3명이고 언니가 4명이며 다섯 번째 부인의 자녀라는 조건에서 (최순실이) 후계자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이라며 “이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최순실이 최태민이 하던 역할을 승계했다는 것은 최순실의 능력과 영향력을 방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알려진 것처럼 최태민은 큰영애 박근혜의 후광을 이용해 각종 이권 개입 등 권력형 비리 행각을 벌였다. 이는 40년이 지난 지금 최순실이 국정을 농단했던 행태와 유사하다.

이 같은 후계 구도 형성에는 최순실의 나이도 영향을 준 것으로 탁 교수는 분석했다. 그는 “최태민 자녀 중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바로 아래 네 살이 적은 최순실이 가장 편한 상대였을 수 있다”며 “이렇게 볼 때 최순실은 능력과 연배 면에서 부친 최태민을 도울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자녀였을 것”이라고 했다.

탁 교수는 또 “최순실에게는 부친 최태민이 노출했던 사이비종교적 모습보다는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사이비종교 재벌 2세 모습이 더 뚜렷해 보인다”며 “다수 이단사이비종교 교주 후계자들은 재벌 2세 모습으로 살다가 사라졌으며 최순실도 예외는 아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다른 2세들은 주로 성(性)과 돈을 탐닉한 반면 최순실은 권력에 집착, 그 권세를 실제로 누렸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최순실은 최태민의 사이비종교성을 전수받지는 못한 것으로 분석된다. 2000년대 후반에는 교회까지 다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최태민의 종교성보다는 권력을 계승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한편 탁 교수는 최태민에 대해 선친인 탁명환 소장의 증언을 언급하면서 “최태민은 신흥 종교단체의 교주이자 유사 무속인, 권력 속 종이호랑이, 가짜 목사였다”며 “특히 최태민의 경우 한국 사이비종교 역사에서 그 누구보다 권력 핵심에 근접한 인물이었다. 체계적 교리와 조직을 갖춘 통일교도 하지 못한 일을 했다”고 평했다. 탁 교수는 “이는 육영수 여사 사망이라는 절묘한 시점과 유자녀인 큰영애를 접근 대상으로 선정했다는 ‘예상 밖 선택’이 이를 가능케 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전쟁 이후 발흥을 거듭한 사이비종교 집단은 정치권력에 유착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를 위해 그들은 반공을 국시로 내건 군사정권 하에서 ‘승공’이나 ‘멸공’ 구호를 외쳤고 최태민 역시 구국십자군을 창립해 멸공을 기치로 내세웠다.

탁 교수는 “최근 신천지나 구원파가 정치권력을 이용하기 위해 선거 등을 통한 친정부 활동에 집중하는 것도 이러한 사이비들의 행태와 무관치 않다”고 덧붙였다.



본지는 2016년 11월 11일 시사면 “최태민 파헤치면 신상에 좋지 않을 것 中情서 압력” 제하의 기사에서 탁지일 교수는 “최근 신천지나 구원파가 정치권력을 이용하기 위해 선거 등을 통한 친정부 활동에 집중하는 것도 이러한 사이비들의 행태와 무관치 않다고 덧붙였다”라는 내용을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는 정치권력을 이용하기 위해 친정부 활동을 했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알려 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