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그림으로 복 되도록 쓰임 받았습니다

입력 2016-11-11 21:03
심찬양씨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공장건물 벽에 그린 '색동저고리를 입은 흑인 소녀'와 한글 그래피티. 심찬양씨 제공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심찬양씨. 김보연 인턴기자
"흑인 여성에게 한복을 입혀야겠다. 특별하고 예쁘겠는 걸…."

미국 로스앤젤레스 길거리에서 10m 높이의 벽을 바라보는 순간 영감이 떠올랐다. 한복을 입히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꽃과 한글, 도종환의 시 구절 중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는 글귀를 그려 넣었다. 힘들어도 작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작가는 바로 그래피티 라이터(graffiti writer) 심찬양(27·서울 이수성결교회)씨다. '그래피티'란 스프레이 페인트로 벽면에 그림을 그리는 예술행위이다.

심씨는 지난 7월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전파된 그래피티를 한국인이 얼마나 멋있고 재미있게 발전시켰는지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3개월간 미국 4개 도시를 순회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그래피티 단체에 합류했다. 일당은 약 50만원. 한국에선 상상도 못할 큰 금액이었다. 돈 걱정 없이 그림만 그릴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입국 며칠 전 샌프란시스코의 한 공장 벽에 색동저고리를 입은 흑인소녀를 그렸다. 그림 옆에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성경구절을 한글로 써넣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거부감 없이 축복으로 여기며 좋아했다.

“아름답다” “가치 있는 그림이다” “같이 작업하고 싶다” 등의 찬사가 쏟아졌다. 힙합 문화의 일종으로 40년 전통을 이어온 그래피티의 본토 미국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심씨는 단박에 유명인사가 됐다.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11일 만난 그는 “갑작스러운 관심에 그저 얼떨떨하다”고 했다. 몇 달 전만 해도 그래피티 재료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지하철, 건설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으로 스프레이값을 충당했습니다. 돈이 없어 그림을 못 그릴 때도 있었어요. 무엇보다 그래피티가 낙서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유명해졌다고 말하자 “그동안 믿고 지켜봐주신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격려해 주신 것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심씨의 아버지는 경북 김천 태촌교회 심현동 목사이다. 할아버지는 경남 고성 동산교회 심은기 원로목사이다.

“어릴 때 아버지한테 그림을 재밌게 배운 기억이 나요. 제가 아버지의 외모와 성격, 습관까지 꼭 빼닮았어요.”

심씨는 아버지께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정신을 배웠다고 했다.

“아버지는 한결같으세요. 목회와 집에서 가족을 대하는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거든요. 아버지가 150여회 헌혈을 하고 생명을 살리는 장기기증을 신청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웃사랑 정신을 배웠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닮고 싶어 그는 필리핀에서 신학을 전공하며 목회와 선교의 꿈을 꾸었다. 그러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좋을 것 같아 3년 전 다시 그래피티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졸업식 후 그냥 떠나기가 아쉬워 학교 벽에 글씨 겸 그림을 그렸죠.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담임선생님이 집에 전화를 하셨어요. ‘찬양이가 학교 벽에다 낙서를 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죠. 한데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그림 그리는 미술선생님이 어떻게 학생이 그린 그림을 낙서라고 표현하시나요? 사과하세요’라고 따지셨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화내시는 거 처음 봤어요. 무엇보다 저를 말썽꾸러기로 여기지 않고 믿어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돼 내심 기뻤죠(웃음).”

심씨는 당분간 국내에서 활동할 계획이다. 개인전을 여는 것도 생각 중이다. 하나님이 어떤 길을 열어 주실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다.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