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호의 골목길 순례자-부산 초량교회] 숭늉 대신 순교로 조선 교회 살리다

입력 2016-11-11 21:19
1892년 미국인 베어드 선교사가 부산에 설립한 초량교회.
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에 있는 베어드 부부 기념비와 일가족 묘지.
부산역 앞 지하도 7번 출구로 나와서 꼬불꼬불한 산동네 이바구길을 올라가면 초량초등학교 골목길에 접어든다. 담벼락에는 초량초등학교를 졸업한 나훈아 이경규 박칼린 등 한류스타 생가터 안내판이 있다. 마치 우국지사 같다. 절로 미소 짓는다.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초량초등학교와 마주한 교회가 있다. 주기철 목사님께서 6년간 목회하신 한강이남 최초 초량교회다. 1891년 2월 제물포항에 도착한 베어드 선교사는 9월에 일본인거류지 끄트머리 영서현에 부산선교부 부지를 매입한다.

1892년 부산선교부 미완성 선교사 사택을 개방하고 영서현교회를 시작한다. 그리고 교회를 영주동으로 옮기면서 영주동교회라 부른다. 1922년 재건축하면서 초량삼일교회라 고쳐 부른다. 부산 독립운동과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1952년 초량교회와 삼일교회로 분립하고, 초량교회는 영주동 산동네에 그대로 남는다. 1896년 베어드 선교사는 대구와 서울을 거쳐 평양으로 선교지를 옮긴다. 우리나라 최초 종합대학 숭실학당(현 숭실대학교)을 설립한다.

105인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베어드 선교사를 숭실대학에서 물러나게 한다. “나는 죽기까지 조선에서 일하다가 조선 땅에 묻히겠다”는 말대로 1931년 평양 숭실대학 교정에 묻힌다. 베어드 선교사는 초량교회를 시작하던 첫 해인 1892년 첫 딸을 낳지만 안타깝게도 1894년 뇌수막염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애니 베이드 사모는 시린 가슴을 찬송가로 달랜다. 찬송시 ‘멀리 멀리 갔더니’를 작사한다.

평양신학교를 졸업 한 주기철 목사는 1926년 1월 첫 임지 초량교회에 부임한다. 스스로 사례비를 삭감한다. 전답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다. 양을 팔아 교회를 수리한다. 신사참배 반대 안을 경남노회에 상정하여 통과시킨다. 마산 문창교회를 거쳐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다. 1944년 4월 오정모 사모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구속된 주기철 목사를 마지막으로 면회한다. “여보, 그 따끈한 숭늉 한 그릇 마시고 싶소” 사모는 단호하다. “목사님이 순교를 하셔야 조선교회가 살 수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서쪽 하늘 붉은 노을’을 찬송하고 순교의 길을 걷는다.

영주동 산동네 골목길에 살아 있는 베어드 선교사의 시린 가슴과 할 수만 있다면 물리고 싶었던 주기철 목사의 순교의 길을 오늘 다시 걷는다. 찬송시가 가슴에 사무친다.

<목사·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