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송병구] 어둠이 깊다, 촛불을 켜라

입력 2016-11-10 17:27

11월이다. 날이 점점 차가워지고, 해의 꼬리가 잔뜩 짧아졌다. 아침녘은 늦도록 어스름하고 이른 초저녁부터 어둑어둑하다. 어느새 일년이 거의 다 지났다는 아쉬움으로 발걸음이 총총하다. 저물어 가는 한 해, 뒤돌아보니 여유 없는 발자국으로 어지럽다. 물론 분주히 애쓴 사람은 결산에 대한 기대도 클 것이다.

계절적으로 11월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일년 중 이달의 캘린더에만 빨간색 휴일을 찾아볼 수 없다. 수능시험이 코앞에 닥쳐와 수험생은 수험생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초조하기만 하다. 연말을 앞두고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니 상인들의 손등은 더 시리고, 겨울의 턱밑에서 난방비가 늘어 서민의 살림살이 역시 부담스러운 때이다. 이젠 나들이철도 다 지났다. 단풍은 이미 떨어졌고 거리에는 낙엽만 뒹군다. 이래저래 반갑지 않은 시절이다.

그럼에도 11월은 추수동장(秋收冬藏)의 절기라고 불렸다. 예부터 농촌에서 가장 여유 있는 달은 이 무렵이다. 음력으로 시월인 이즈음은 연중 첫째가는 달로 쳤다. 그래서 ‘상(上)달’이라 하여 추수제를 올렸다. 순우리말 이름으로 ‘고마운 달’로 불리는 이유다. 교회가 해마다 11월 중에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까닭과 의미가 통한다.

어둠이 깊어가는 11월이야말로 경건한 달로 삼을 만하다. 그리스도교 문화를 간직한 독일의 경우 유명한 바덴바덴의 카지노는 일년 중 단 4일만 문을 닫는데, 고난주간 성금요일을 빼면 나머지 3일은 11월에 쉰다고 한다. 1일 ‘만성절’(모든 성인의 날), 16일 ‘회개와 기도의 날’(교회력 마지막 주일 직전 수요일) 그리고 20일 ‘영원한 주일’(교회력 마지막 주일)이다. 11월은 카지노도 인정한 경건의 달인 셈이다.

어떤 독일 사람들은 다른 이유로 11월에 잔뜩 의미를 부여한다. 숫자 ‘11’(엘프)이 프랑스 대혁명의 세 가지 구호 ‘평등, 자유, 우애’란 세 단어의 첫 글자(elf)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11월은 혁명의 달인가? 그들은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을 탄생시킨 ‘11월 혁명’이란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교회력의 경우, 11월은 세간의 달력보다 약 한달 빠르다. 올해 한 해를 마감하는 교회력 마지막 주일은 11월 20일이고, 새해를 시작하는 대림절 첫째 주일은 11월 27일이다. 교회는 이날부터 성탄일 전까지 4주간을 대림절(Advent)로 지킨다. 11월을 가리켜 끝이며 동시에 시작을 의미하는 ‘끄트머리 달’로 부르는 배경이다.

어둠이 가장 깊은 대림절에 ‘기다림 초’를 켜는 일은 얼마나 경건한가. 사실 밝혀야 할 촛불은 이뿐 아니다. 한겨울보다 더 잔뜩 얼어붙은 매서운 분노는 지금 뜨거운 등불을 요청하고 있다. 당장 헬조선과 흙수저에 절망한 민심은 이젠 배신감과 황당함으로 헛헛한 빈 가슴을 토로한다. 이미 광화문광장과 정부서울청사 앞, 서울역과 도심의 재벌가 빌딩 앞은 온통 억울함을 호소하는 농성장이 되었다. 거리와 광장은 성난 아우성으로 가득하다.

세상은 계절보다 더 어둡기만 하다. 1980년대 중반, 우리나라처럼 민주화의 산고를 겪던 필리핀 대중운동조직인 남프렐은 “어둠을 탓하지 말고 한 자루 촛불을 켜라”고 하였다. 우리 속담에도 “어둠을 쫓으려면 촛불을 켜고 도깨비를 만나면 등불을 밝혀라”고 하지 않던가.

끝내 세상의 이목을 가릴듯하던 어둠의 지배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진실의 등불이다. 올 11월은 그야말로 폭풍전야다. 어둠 속 등불들의 행렬은 비록 흔들릴지언정, 결코 꺼뜨릴 수 없다. 정의와 진리의 등불로 다시 세상을 밝힐 때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삼하 22:29).

송병구 색동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