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넥타이 부대 → 유모차 부대 → 실버 부대 힘 보탰다
입력 2016-11-10 04:05
지난달 29일 ‘최순실 국정농단’에 분노한 민심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3만명이었던 ‘촛불’은 지난 5일 20만명으로 급증했다. 오는 12일 집회에는 100만명이 광장에 모일 전망이다. 평범한 이들이 대규모로 모여 벌이는 시위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와 닮은꼴이다. 다만 상징적인 참여 계층과 시위문화 등은 과거와는 다는 모습이다.
넥타이→유모차→실버
목적만 놓고 보면 지금 집회는 1987년의 6월 항쟁에 더 가깝다. 관통하는 키워드는 ‘민주화’다. 6월 항쟁은 직선제 개헌을 통한 정권 퇴진, 이번 집회는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고 있다. ‘군부’나 ‘비선실세’가 아닌 국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9일 “6월 항쟁은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투쟁이었고, 이번 집회는 그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려는 투쟁”이라며 “공통적으로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이자 헌법 수호 의지의 표출”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광우병 시위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라는 특정 정책을 겨냥했으므로 결이 다르다”고 덧붙였다.
시위의 판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상징’은 저마다 다르다. 6월 항쟁은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사무직 직원과 중산층이 결집하면서 흐름을 바꿨다. 광우병 시위에선 ‘유모차 부대’로 대표되는 가족 단위 참석이 많았다. 올해는 평소 집회나 시위 참여가 거의 없던 노년층 ‘실버부대’가 두드러진다.
시위에서 축제로
민심이 자발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은 올해와 2008년, 1987년 상황이 같다.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광우병국민대책회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라는 ‘중심 조직’이 있지만 지발성은 더 커졌다.
이종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관리실 부장은 “1987년에는 6월 10일 오후 6시를 기점으로 전국의 교회, 성당, 사찰이 일제히 타종하는 등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하달하는 지침이 뚜렷했다”며 “2008년은 1987년에 비해, 올해는 2008년에 비해 시민 자발성이 커지는 대신 ‘조직’ 구심력은 약해지는 흐름”이라고 분석했다.
평범한 이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집회·시위 문화도 변하고 있다. 2008년 연예인 등이 주도하는 ‘문화제’가 시위 프로그램으로 등장했다. 올해엔 ‘최순실 가면’ ‘공주전’ 등 풍자문화를 앞세운 ‘축제 같은 시위’가 자리를 잡았다. 김동규 경제민주화네트워크 사무처장은 “2008년 이후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참여 자체가 목적인 축제로 시위를 즐기는 경향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번 집회에서는 특히 시민들이 경찰과 대치하면서도 몸싸움을 자제하는 등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경찰은 “나라를 사랑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로 화답했다. 대규모 인원이 참여했지만 지금까지 두 차례 집회에서 입건자는 3명에 그친다. 아직 부상자도 나오지 않았다. 이종률 부장은 “법치가 자리 잡아 표현의 자유가 보장됐다. 시민들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면서 분위기가 변하는 것”이라고 봤다.
‘해피엔딩’ 가능할까
6월 항쟁은 6·29선언, 직선제 개헌을 일궈내면서 성공한 투쟁으로 역사에 남았다. 광우병 시위도 부침을 겪기는 했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내각이 책임지고 총사퇴한 뒤 가축전염병예방법이 개정되고 음식점원산지표시제가 도입됐다.
이번 집회의 분수령은 오는 12일로 예정된 민중총궐기다. 김형준 교수는 “이번에는 사과나 ‘수습’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며 “대통령의 권위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남은 방법은 물러나는 것 뿐”이라고 했다.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주권자의 분노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번 집회는 성공적이지만 박 대통령이 퇴진한다면 완벽한 성공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경찰은 청와대 인근 청운효자동 주민센터까지 가겠다는 12일 집회의 행진 신고에 대해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이남까지만 행진하라”며 ‘제한 통고’를 했다. 민주노총 측은 “주민센터까지 무리하게 진입하지는 않겠지만 종로·서대문 방향에서 청와대를 포위하는 식으로 행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수민 오주환 기자 suminism@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