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타임스(NYT)는 9일(현지시간) “기득권에 대한 충격적인 거부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전했다. 트럼프는 이날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패배를 인정한 직후 연설에서 “우리나라에서 잊혀지고 무시됐던 사람들이 더 이상 망각되거나 무시당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소외되고 분노한 백인 노동자 결집
잊혀지고 무시당했던 미국인들이 똘똘 뭉쳐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세운 것이다. 이들의 주축은 저학력·저소득 백인 남성이다. 워싱턴 주류 기득권 세력에 불만을 품고 변화를 열망한 이들이 정계 이단아를 권좌에 올렸다. 지난 6월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성난 민심이 기성 정치권의 유럽연합(EU) 잔류 호소를 거부한 것과 흡사하다. 트럼프는 ‘미스터 브렉시트(Mr. Brexit)’가 될 것이라던 호언을 실천했다.
클린턴은 일각에서 ‘역대 가장 형편없는 공화당 후보’이자 ‘하늘이 내려준 쉬운 상대’라고 폄하하던 트럼프를 꺾지 못했다. NYT와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미 주류 언론 57곳이 지지 선언을 하며 클린턴을 밀어줬음에도 밑바닥 민심을 자기 쪽으로 돌리지 못했다. 거짓말을 일삼는 구닥다리 정치인이자 오랜 세월 워싱턴 정가에서 단물만 빨아온 엘리트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워내지 못했다.
민주당의 확실한 지지 기반인 여성과 젊은층, 흑인과 히스패닉은 클린턴을 확실하게 밀어주지 않았다. CNN방송 출구 조사에서 여성 유권자의 54%만이 클린턴을 지지했다. 백인 여성 중에선 53%가 트럼프를 택했다. 2012년 대선 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몰표(93%)를 줬던 흑인 유권자는 이번에 88%만이 클린턴을 지지했다. 민주당이 큰 기대를 걸었던 히스패닉 표심도 65%만 가져오는 데 그쳤다. 18∼29세 유권자 층에서 클린턴을 택한 비율도 54%에 불과했다.
부동층과 숨은 표 트럼프 쪽으로
지난달 28일 미 연방수사국(FBI)이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을 재수사한다고 밝혔을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클린턴 승리로 굳어지던 판세가 갑자기 요동쳤다. 그러나 이메일 스캔들이 트럼프 승리의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 FBI 재수사 이슈는 역대 최대 규모의 부동층이 트럼프 쪽으로 급격히 기우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통계 전문가 네이트 실버는 “2012년 대선 때 5∼10% 수준이던 부동층과 제3후보 지지층이 올해는 20%에 육박한다”고 밝혔다. 부동층에는 ‘샤이(shy·부끄러워하는) 트럼프 유권자’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의 막말이나 극단적 공약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던 샤이 유권자들이 대거 투표소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는 선거 전 여론조사에선 잘 잡히지 않던 ‘숨은 표’다. 저학력 블루칼라(육체노동자) 백인 남성이 ‘드러난 표’였다면 고학력 화이트칼라(사무직) 백인 남성 중 상당수가 ‘숨은 표’였다가 이번에 수면 위로 드러난 셈이다.
블루칼라·트럼피즘, 승부처 싹쓸이
CNN 출구 조사를 보면 대졸 미만 백인 남성의 72%가 트럼프를 찍었다. 특히 대선 초반부터 승부처로 꼽히던 러스트벨트(쇠락한 북동부 공업지대)에서 블루칼라 백인의 결집이 결정적으로 승부를 갈랐다.
러스트벨트는 뉴욕에서 펜실베이니아 웨스트버지니아 오하이오 인디애나 미시간 일리노이를 거쳐 위스콘신까지 연결되는 지역이다. 거대한 공업지대로 융성했으나 1990년대 이후 세계화와 자유무역협정(FTA) 여파로 제조업 일자리가 줄면서 지역경제가 쇠퇴했다. 그러니 지역 민심이 좋을 리 없다. FTA 파기와 불법이민 금지를 천명한 트럼프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러스트벨트 8개주 가운데 뉴욕과 일리노이를 제외한 6곳이 트럼프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선거에서 표출된 민심은 ‘트럼피즘(Trumpism)’으로 요약된다. 거침없이 말하는 초당적 인물인 트럼프의 언행과 생각하는 방식에 열광하는 현상을 말한다. 기득권층이 장기 집권하는 동안 국민적 피로와 불만이 누적돼 트럼피즘이 생겨났다.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이민자들이 기존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피해의식과 반발심도 여기에 한몫했다.
NYT는 “소외된 블루칼라 백인과 노동자 계층은 수십년에 걸친 세계화와 다문화주의 속에서 미국의 약속이 자신들의 손에서 빠져나갔다고 느꼈다”고 분석했다.
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
[美 트럼프 시대] 샤이한 백인 '숨은 표' 승패 갈랐다
입력 2016-11-09 18:04 수정 2016-11-10 0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