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하면서 한국의 대미(對美) 외교는 한동안 혼란이 불가피해졌다. 트럼프 당선자의 외교·안보 정책은 아직 윤곽조차 불투명하다. 하지만 그가 쏟아놨던 말들만 놓고 보면 한·미동맹을 축으로 한 안보 질서에 격변이 예상된다. 우리 외교 당국도 예상 밖의 결과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자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주창하고 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이어오던 ‘개입주의’ ‘아시아 중시’ 노선을 버리고 ‘고립주의’로 되돌아가겠다는 뜻으로 해석돼 왔다. 이 정책이 현실화돼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빈자리를 중국이 차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금과는 정반대의 안보 패러다임이 열리는 것이다.
박 대통령 축전 ‘한·미동맹’ 강조
박근혜 대통령은 9일 트럼프 후보가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축전을 보냈다. 박 대통령은 축전에서 “북한 문제 등 현안 해결과 한·미동맹 발전을 위해 양국 공조를 더욱 굳건히 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앞서 청와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 결과 보고를 받고 “북핵 문제를 위한 한·미의 강력한 대북 제재·압박 기조가 미국 차기 행정부 하에서도 흔들림 없이 지속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주기 바란다”고 외교안보 부처에 주문했다. 이어 “미국은 우리 동맹국으로서 한·미 관계가 우리 외교안보 및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향후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계 발전을 돈독히 해 나가기 위한 방안을 면밀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북핵 및 미사일 위협이 날로 고조되는 엄중한 상황을 감안해 인수위 단계부터 미국 차기 행정부와의 협력 관계를 조기에 구축해 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청와대는 별도 논평을 통해 “정부는 트럼프 후보 당선을 계기로 미국 차기 행정부와도 한·미동맹 관계를 한층 심화·발전시켜 한반도 및 동북아 지역은 물론 세계 평화와 번영을 위해 계속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안보 정책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한·미 관계는 ‘한 줄기 빛 샐 틈 없는’ ‘굳건한’ 동맹으로 평가됐다. 이 기간 중 북한은 핵실험을 네 차례 실시하며 핵·미사일 개발 능력을 키웠고 한·미 양국은 압박 일변도의 대북 정책을 펼쳤다. 동시에 오바마 행정부는 중국의 부상을 견제·관리하고자 한·미, 미·일동맹을 중시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런 전략을 대폭 수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2000년대 초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 등 과도한 개입주의 노선에 대한 미국인의 불만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한국에 ‘정당한 몫’을 내라며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압박할 가능성도 높다. 기본적으로 안보가 아닌 경제적 관점에서 한·미동맹을 바라볼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특히 트럼프 당선자는 후보 시절 주한미군 철수는 물론 ‘한·일 핵무장’ 용인 같은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일각에선 핵무장 용인론이 다시 불거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이 발언이 그의 소신인지, 아니면 그저 이목을 끌려던 것이었는지 여전히 불투명하다. 미국 전문가들은 트럼프 당선자가 외교·안보에 무지한 탓이라고 일축하지만 실제 정책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트럼프 측이 현실적 판단에 따라 정책을 집행할 것이란 기대감도 있지만 그의 행태를 볼 때 이런 기대는 순진하거나 위험천만하다는 지적도 있다”면서 “참모 조언과 국민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외교·안보라인 ‘초비상’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우리 외교·안보라인의 움직임도 다급해졌다. 청와대는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주재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열었다. 외교부 등 관계부처와 새누리당은 미 대선 관련 당정협의를 갖고 정부 내에 분야별 태스크포스(TF)를 24시간 가동키로 했다.
새누리당 김광림 정책위의장은 “방위비 분담금 문제는 압박이 세게 오겠지만 트럼프 당선인이 (현실을) 이해하면 조금 요구가 낮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정부는 한·미 동맹, 대북 압박, 사드(THAAD) 배치 등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큰 변동이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주미 공관은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트럼프 캠프 등 공화당 인사들과 100차례 이상 접촉해 왔다. 하지만 정계와 관계, 학계 등 캠프 안팎에 많은 인사가 포진한 클린턴 측과 달리 트럼프 캠프는 외교·안보 분야 인력풀이 제한적이다. 향후 새 행정부와의 관계 형성에 어려움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
트럼프 당선자가 후보 시절 했던 발언들의 진의 파악도 시급하다. 올해 초 트럼프 진영은 우리 정부 관계자를 만나 “트럼프 측도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방위비 분담금 발언의 타깃은 한국이 아니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라고 귀띔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후에도 트럼프는 “한국이 분담금을 100% 부담하는 건 왜 안 되느냐”는 등 강경 발언을 계속했다.
조성은 남혁상 하윤해 기자
jse130801@kmib.co.kr
[트럼프 시대-시리즈(1)] ‘美 고립주의’ 광풍… 동맹의 틀 패러다임이 바뀐다
입력 2016-11-09 18:22 수정 2016-11-10 0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