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밤 10시10분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검은색 상·하의와 검정 야구모자 차림의 차은택씨가 모습을 드러내자 취재진 50여명이 순식간에 그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앞서 차씨는 공항에서 대기 중인 검찰 수사관에 의해 체포된 상태였다. 차씨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상황을 실감한 듯 고개를 숙였다.
긴장한 얼굴로 취재진 앞에 선 차씨는 “물의를 일으켜 정말 죄송하고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운을 뗐다. 이어 “(제기된 의혹에 대해) 검찰 조사에 사실대로 성실히 임하겠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일본행’에 대해서는 “1주일 전 잠시 다녀왔다”고만 했다.
차씨는 ‘비선실세’ 최순실(60·구속)씨나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사업 논의를 했는지에 대해 “검찰에서 소명하겠다”며 입을 다물었다. 안종범(57·구속)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과의 관계는 “조금 아는 사이”라고 했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과 만남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뿐이고,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이날 밤 서울중앙지검으로 압송된 차씨는 검찰 청사 앞에서도 “검찰 조사에서 답변하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차씨의 귀국으로 검찰 수사도 속도가 붙게 됐다. 차씨는 체육계 등 각계에서 자행된 최씨의 국정농단 가운데 미르재단을 중심으로 한 문화계 비리 의혹을 잘 설명해줄 인물로 꼽힌다. 검찰은 차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박근혜정부 문화계 인사 개입, 대기업 상대 전횡 등 다양한 부분을 수사할 방침이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는 차씨의 혐의를 상당 부분 구체화한 상태다. 검찰은 차씨의 딸(15)을 포함한 일가족 4명의 7년여 동안 개인계좌, 차씨와 관련된 4곳의 법인계좌를 압수수색해 수상한 자금 흐름을 추려냈다. 차씨는 자신이 운영한 ‘아프리카픽쳐스’에서 회삿돈 약 7억원을 착복한 혐의(특경가법상 횡령)를 받고 있다. 안 전 수석과 공모해 포스코그룹 계열 광고사인 포레카 지분을 강탈하려 했다는 의혹도 조사 대상이다.
차씨의 횡령 혐의는 그가 ‘문화계 황태자’로서 각종 정부기관 인사에 개입했다는 의혹과도 얽혀 있다. 실제로 검찰이 계좌 추적에서 가장 공들인 것은 차씨의 ‘대부’로 불리는 송성각(58)씨가 한국콘텐츠진흥원장에 공모하기 직전까지 경영하던 업체 ‘머큐리포스트’ 부분이었다. 검찰은 제2금융권 등 전체 금융권에서 머큐리포스트와 거래한 상대방의 직장 정보까지 모았다. 차씨의 ‘포레카 강탈’에 관여한 혐의를 받는 송씨는 7일 밤 체포됐다.
송씨 외에 김종덕(59) 전 문화체육부 장관, 김상률(56)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등이 차씨가 ‘앉힌’ 인사들로 거론된다. 차씨는 김 전 장관의 홍익대 대학원 제자다. 숙명여대 교수였던 김 전 수석은 차씨의 외삼촌이다. 미르재단 소속으로 차씨와 인맥이 있는 이들은 이미 검찰에 다녀갔다. 김형수(57) 전 이사장은 차씨와 사제지간이고, 차씨의 여러 회사에서 임원으로 등재된 김성현(43) 미르재단 사무부총장은 측근으로 꼽힌다.
차씨는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 상태에서도 회사에 업무 지시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회사 임직원 결혼식에 자신 명의로 축하 화환까지 보냈다. 검찰의 계좌 압수수색 이후에는 서울 논현동과 청담동의 개인 빌딩, 빌라를 매물로 내놓으며 자산 현금화에도 몰두하고 있다.
이경원 기자, 인천공항=김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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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은택 “안종범 조금 알아… 대통령 개인적으론 못 만나”
입력 2016-11-09 0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