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조준 <8> 세속화된 청년모임 해산… 말씀 중심으로 재조직

입력 2016-11-08 21:09
1967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로 유학을 떠날 당시 배웅을 나온 이들과 함께 한 필자. 오른쪽부터 아내 최영자 사모와 자녀들. 왼쪽은 한경직 목사 부인 김찬빈 사모.

‘교회 청·장년 교육 구조를 반드시 바꿔야 한다.’ 나는 정면돌파를 하겠다는 각오가 단단히 서 있었다. 이는 담임 목사님의 전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당시 청년부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청년부 임원들 중에는 교회노선에 반대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주일에 그룹 모임으로 예배를 대신하기도 했다. 주말 활동 시간에는 찬송 대신에 ‘노란 셔츠의 사나이’ 같은 대중가요를 부르는가 하면 성경공부 대신 포크댄스를 추기도 했다.

나는 기도 끝에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기존 청년 모임을 해산했다. 이어 기도와 말씀, 봉사 중심의 교회 방침을 따르는 청년들이 주축이 된 모임을 새롭게 구성했다. 그리고 나서야 청년들의 신앙생활이 차츰 달라졌고, 제대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내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유학할 때 대학생 모임에서 부르며 은혜를 받았던 복음송을 번역·출판해 청년 모임에서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만남의 송가’란 복음송가집인데, 아마 한국교회에서 복음송을 처음 부르기 시작한 계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다고 나는 믿는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그들의 영혼이 잘되게 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야 마땅하다.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9∼10) 사도 바울의 말씀은 평생 목회하는 데 나침반이 되었다.

한경직 목사님의 추천으로 교회 후원을 받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 역시 목회에 큰 자산이 되었다. 한 목사님과 영락교회에 진 사랑의 빚은 평생 갚아도 갚을 길이 없을 것이다. 바울의 말처럼 ‘전제와 같이 다 부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성도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사명을 다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리라.

한 목사님의 은퇴 시기가 다가올수록 교계와 사회의 관심이 영락교회로 모아지고 있었다.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그의 후임으로 오려는 이들이 정치적으로 활동하는 게 눈에 띄었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목사를 밀어주고자 하는 낌새도 엿보였다.

이상한 것은, 내 마음 속에서는 영락교회를 맡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까닭은 나 스스로 생각할 때 훌륭하신 한경직 목사님의 대를 잇는다는 것이 자신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분이 담임목사로 계실 때까지 성실히 도와드리는 것만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해 동안 영락교회에 몸담고 있어보니 ‘이 교회는 나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곳이구나’하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속 한편에서는 ‘목사 안수를 받은 뒤에 나를 영등포로 인도해주신 하나님이 또 내게 적합한 교회로 인도해주실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향해 “너는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처럼 나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덕분에 나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해 걱정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