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교회가 또 다시 청빙을 요청할 당시 내 나이는 33세였다. 지난 6년간 영은교회를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이 부목사 경험도 없는 목회 초보생을 오로지 사랑으로 감싸준 덕분이다. 하지만 나 스스로 생각하면 너무나 많은 실수가 있었다.
영락교회 요청에 대해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에 한경직 목사님이 꿈에 나타나셨다. 한 목사님이 강단에 서 있다가 쓰러지시는데 내가 옆에서 부축해드렸다. 나는 이 꿈이 한 목사님을 도와드리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가 소속된 경기노회에 사표를 제출했다.
임시노회에서 사표수리 문제를 논의하는데, 의견이 좀처럼 모이지 않았다. “젊은 목사에게 기회를 줘서 좀 더 배울 수 있도록 해주자” “교회가 그렇게 붙잡는데 목사가 뿌리치고 다른 교회로 옮겨야 하느냐” 찬반 의견이 오갔다. 노회가 열리는 장소로 달려온 영은교회 장로와 권사, 집사들은 “우리 목사님을 보내면 절대 안 됩니다”라고 외치며 시위를 했다.
노회장은 사표를 제출한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자고 했다. “할 말이 없습니다.” 노회원들 앞에 나섰지만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 울다가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결국 가부(可否)를 투표로 결정했는데, ‘보내도록 하자’는 표가 몇 표 더 많아 간신히 사표가 수리됐다.
교회를 떠나는 마지막 주일, 온 교회가 눈물바다가 됐다. 감사함과 미안함이 뒤범벅되는 당시의 광경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예배당 건물 벽돌 하나하나에, 교회 정원에 심은 나무와 꽃들까지도 나의 정성과 사랑이 배어 있었다.
나는 영은교회를 떠난 후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 떠난 목사가 예전 시무교회에 드나드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다. 몇 해 전 교회창립 50주년 기념 성회를 인도해달라는 부탁이 있어서 44년 만에 들러서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다.
영락교회 부목사로 부임한 뒤 평신도부에서 청·장년 교육부서 지도를 맡았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영적인 위기에 봉착했다. 나로서는 역경의 시기였다.
당시 한국교회는 많은 젊은이들이 자유주의 신학과 세속화 신학에 크게 영향을 받던 시기였다. 그 당시 장년부 성경공부는 대개 여러 신학교의 교수님들이 강사를 맡아서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사들의 강의는 담임 목사님의 목회철학이나 노선과는 상관없는, 세속적으로 관심을 끄는 내용이 많았다. 이 때문에 교인들이 영적으로 혼선을 빚고 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설상가상으로 젊은 청년들은 그들 기호에 맞는 활동까지 하다보니 교회 활동인지 일반 사교 클럽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평신도 교육을 책임진 나로서는 상상 밖의 일이었다. 영락교회가 한국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은데 난감했다. 고민 끝에 담임인 한경직 목사님께 내가 본 교회의 평신도 교육에 대해 분석하고 진단한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한 목사님의 한 마디에 나는 큰 힘을 얻었다. “나는 박 목사에게 맡겼으니까 소신껏 하세요.”
평신도 교육 구조를 바꾸기로 했다. 성경공부반 강사를 외부강사에서 교회 내 부교역자들로 교체했다. 곧바로 반발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담임 목사님의 목회 방향에 어긋나는 교육은 차라리 안하는 것보다 낫겠다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그래픽=이영은 기자
[역경의 열매] 박조준 <7> ‘눈물바다’ 영은교회 성도들 떠나 영락교회로
입력 2016-11-07 2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