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려고 이 나라의 국민 된 것 아니다.” 서울 광화문에 촛불을 들고 나온 시민들은 이렇게 울분을 토했다. 지난 4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며 “이러려고 대통령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고 말한 것을 패러디한 것이다. 5일 서울에서만 20만명(주최 측 추산·경찰 추산 4만5000명)이 모였다. 같은 시각 전국 곳곳에서도 박 대통령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대통령의 하야와 탄핵을 주장했다.
현직 대통령의 거취를 요구하는 집회가 열린 것은 지난 1987년 전두환 정권 퇴진 시위 이후 처음이다. 참가자 중에는 중고생들과 가족 단위가 적지 않았다. 전문 시위꾼들의 선동이 아닌,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자발적 집회 참석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진 다수의 국민이 박 대통령에게 즉각 물러나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는다. 대통령을 신뢰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경제와 안보 위기 속에서 이 나라의 국정이 한순간에 올스톱되는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야 된다는 절박감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국정마비 사태는 전혀 풀릴 기미가 없다. 담화 이후에도 정치권과 여론은 호전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태로 또 흐르면 이번 주말에는 더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켜고 청와대를 에워쌀 수 있다. 12일에는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대규모 장외투쟁까지 잡혀 있다. 시간은 결코 대통령과 청와대 편이 아니다.
그 전까지 국정을 정상화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김병준 국무총리 지명 철회가 첫 단추가 될 수 있다. 야당이 전부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김 내정자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보낸다 한들 가결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김 내정자가 스스로 물러나 대통령의 부담을 덜어줄 수도 있겠지만, 박 대통령이 먼저 지명을 거둬들여 야당과 국민에 대해 정성을 보이는 게 정국을 푸는 데 더 나을 것이다. 이후 여야 협의를 거쳐 국회가 추천하는 인사를 대통령이 총리로 지명해 거국내각 수준으로 정부를 구성, 운영하는 절차를 밟을 수 있다. 국민의 신뢰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박 대통령은 국정의 2선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야3당에도 촉구한다. 지금은 특정 대선 후보나 특정 정파의 집권 전략을 염두에 둘 정도로 시국이 한가하지 않다. 대통령 권력이 사실상 식물 상태에 빠진 이상 국회의 다수 세력을 차지한 야당은 국정운영의 책임감을 갖고 임해야 한다. 대통령에게 요구 사항을 내거는 것 못지않게 국가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정치 지도자와 정당, 정파는 대한민국호(號)가 난파되지 않도록 머리를 맞대야 한다.
[사설] 김병준 국무총리 지명 철회에서 시작해 보자
입력 2016-11-06 1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