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곳이다.
영은교회는 소위 세상에서 유력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아니었다. 성도들은 주중에 일터에서 성실하게 일하다가 기다리던 주일이 되면 정성껏 준비해 예배드리러 나왔다. 말씀을 그대로 받아드리며 “아멘”하고 화답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성도들 사이 뿐 아니라 담임 목사를 향한 교인들의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 정성이었다.
교인들 중에 안양천 둑에 움막을 짓고 지내는 분들이 있었다. 심방을 가면 목사를 정성껏 대접한다고 밀가루 반죽을 해서 수제비를 만들어 주셨다. 맛있다고 하니 더 주셨다. 그 정성을 생각해서 먹기는 했지만 내 위의 소화 능력이 감당할 수 없어 화장실에서 모두 토해낸 적도 있었다.
나는 중학생 시절, 찬밥 먹은 것이 잘못되어 위궤양을 앓으면서 오랜 세월 고생을 했다. 175㎝ 키에 몸무게가 55㎏밖에 나가지 않았다. “바람에 날아갈 것 같다”는 말을 곧잘 들을 정도였다. 식사를 하고 나면 소화시키는 것이 크나 큰 부담이었다. 밥을 먹은 후 고통 없이 지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교인들 사이에 “우리 목사님은 수제비를 좋아하신대”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심방 갈 때마다 수제비를 대접받은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교회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교회 부지를 구입하고 3년이 되던 해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1층 공사가 끝나고 2층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어느 날, 영락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부목사로 와 달라는 초빙 요청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당회와 제직, 성도들은 난리가 났다. “이렇게 은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왜 우리 목사를 데려 가려 하느냐” “영락 교회면 다냐”….
성도들의 반발이 너무 심했다. 나는 사실 그 때까지 한경직 목사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었다. 그저 멀리서 존경하고 그 분의 방송설교를 통해 은혜 받으며, 참으로 훌륭한 설교자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그냥 잠자코 있자니 교회 입장이 어려울 것 같았다. 만일 내가 떠나면 교회에 큰 상처를 남길 것 같아서 한 목사님을 찾아갔다.
“부족한 저를 불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목회자의 양심상 영은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목사님 요청에 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한 목사님께서는 퍽 아쉬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이면 다음에 기회가 또 있겠지요.”
목사가 마음을 정하자 교회는 안정을 되찾았다. 교회는 계속 성장했다. 예배당 건축을 완공하고도 교회가 비좁아 영등포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2부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당회가 열리면 당회원들은 한결같이 목사의 계획에 찬성표를 던져주셨다. 그때마다 나는 막중한 책임감이 더해졌다. 그래서 무슨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더 많이 기도하고 연구하고 계획해서 당회에 올렸다. 모두가 목사인 내 책임이기 때문이다.
영은교회는 많은 교회와 교역자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예배당을 신축해 완공하고 위임식까지 모두 마쳤는데, 영락교회에서 또 다시 청빙 요청이 왔다. ‘남아있을 것인가, 새로운 곳에서 좀 더 배울 것인가.’ 고민이 시작됐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역경의 열매] 박조준 <6> 목사-성도 마음이 맞으니 영은교회 날로 부흥
입력 2016-11-06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