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색면 추상의 거장’ 유영국 작품세계 돌아본다

입력 2016-11-07 00:00
‘작품’. 1973년 작, 캔버스에 유채, 53×65㎝. 개인 소장. 유영국의 작품은 삼각형과 원을 주요 형태로, 빨강·파랑 등 삼원색을 주조색으로 하면서도 색과 형태의 변주를 통해 자신이 성장하며 늘 봐왔던 울진의 산을 연상시키는 추상화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80년대의 유 화백의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추상화가 뭐냐.” “모던 아트라는데요” “그게 뭐냐” “…”

그가 머뭇거리자 교실은 순간 웃음바다가 됐다. 중학교 때 아버지 직업을 조사하던 시간에 일어났던 일이다. 그 얘길 집에 가서 아버지 유영국(1916∼2000)에게 했더니 “그럼 앞으론 아방가르드라고 해라”라고 했다. 다음해에 시키는 대로 했다가 더 웃음거리가 됐을 뿐이라고 장남 유진(66)씨는 말했다. 1960대 초반의 일이다. 그 때 한국사회에서 추상화는 그렇게 낯선 장르였던 것이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한국의 1세대 추상화가인 유영국의 작품세계를 돌아보는 ‘유영국, 절대와 자유전’이 열리고 있다. 올해 과천관 설립 30주년을 맞아 탄생 100주년이 되는 작가를 조명했는데, ‘황소의 화가’ 이중섭, ‘고려인 화가’ 변월룡에 이어 마지막 전시다.

경북 울진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유영국은 1935년 도쿄 문화학원에 입학해 추상의 세례를 받았다. 일본인의 재야단체인 자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면서 김환기와 함께 당시 도쿄에서도 전위적이던 추상화를 한국 역사상 최초로 시도했던 것이다.

1943년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고향 울진으로 돌아왔고 가족을 일구며 어부, 양조장 등 생계유지를 하면서 사업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어느날 그가 선언했다. “금산도, 금밭도 싫다. 나는 그림을 그리러 서울로 가겠다.” 마흔이 되던 해였다.

1955년 이후 서울에서 본격적인 미술활동을 재개하며 신사실파, 모던아트협회, 현대작가초대전, 신상회 등 전위적인 미술단체를 이끌던 그는 1964년을 기점으로 그룹 활동에 종언을 고하고 개인전을 열며 미술계에 화제를 모았다.

유영국의 작품은 점, 선, 면, 형태와 색채 등 기본적인 조형요소가 주인공인 추상화이다.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추상화의 선구자 몬드리안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왜 몬드리안이냐, 왜 추상화이냐고요. 추상은 (형상이 있는 구상화와 달리)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온갖 인간의 비극이 다 말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해방과 한국전쟁 등 격동의 한국을 살아가면서 그는 ‘무언’으로 세상과 거리를 뒀고, 작품 역시 그러했다.

유영국의 작품세계는 추상화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보더라도 한국의 산과 자연이 연상 된다. 풍경적 추상화이다. 제목도 산이 많다. “내 작품에는 산이라는 제목이 많은데 그건 산이 많은 고장에서 자란 탓일 게다.”

전시에는 울진의 산악을 연상시키는 추상화 작품들이 시기별도 대거 나왔다. 1960년대의 작품들은 두텁게 물감을 발라 마티에르가 강하고 빛과 어둠이 강조되며 자연의 숭고함이 느껴진다. 후기로 갈수록 형태는 단순해지고 기하학적으로 변하며 표면감도 얕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색채는 노랑, 빨강, 파랑 등 삼원색을, 형태는 삼각형과 원을 주조로 하는데, 누구든 대자연을 맞닥뜨렸을 때의 자기만의 기억을 불러내게 된다. 숭고, 넉넉함, 찬란함, 공포 등 각기 다른 감정을 자아낸다.

1937년 유학시절부터, 병으로 절필을 선언하던 1999년까지의 60여년 화력을 보여주는 작품 100여점이 나왔다. 개인 소장가의 집에 있던 것까지 포함해 이렇게 그의 작품이 대거 나오기는 처음이다. 그러나 많이 보는 즐거움은 있으나 국립현대미술관이라면 마땅히 제시해야할 새로운 담론이 없어 아쉽다. 시기별로 작품을 공간을 나누어 진열했을 뿐 전시주제가 왜 ‘절대와 자유’인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내년 3월 1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